항일유적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항일유적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 강동오 수습기자
  • 승인 2006.08.27
  • 호수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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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오기자의 중/국/항/일/유/적/탐/방/기
지난 11일, 대학생 항일 유적 기자단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중경에 도착한 다음 날 처음으로 간 곳은 연화지와 오사야항 임시정부 청사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찾아간 연화지 청사는 비교적 깔끔하게 보존돼 있었다. 청사 내부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과 함께 당시 활동했던 사진과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조선족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선열들의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

연화지 청사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오사야항 청사가 나온다. 이 유적지는 조금 전에 들렀던 연화지 청사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임에도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집들이 있는 길 한쪽, 비석 한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인 유적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소홀했는지 처음으로 실감하게 됐다. 그 뒤로 이어진 광복군 총사령부 옛 터는 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1층 계단을 올라서는데, 과거 유적지였다는 흔적이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가슴이 아파 왔다.

중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뒤 버스로 덜컹거리며 도착한 곳은 가흥 매만가 76번지. 김구 선생의 피난처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항일 운동가인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곳이라 그런지 침실을 비롯해 김구 선생이 탈출 시 사용했다는 나룻배가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보존돼 있었다. 또 관람객들을 위해 선생의 침대 위치를 옮겨 탈출구가 보이도록 해 놓았다. 이렇게 보존이 잘 돼 있는 김구 선생의 흔적이지만, 우리 기자단을 제외한 다른 관람객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드나들어야 할 입구도 열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이 적어 문까지 잠가 둔다는 것은 얼마나 사람들의 발길이 인색한지를 아주 뚜렷하게 보여 주는 예였다.

바삐 발길을 옮겨 상해에 와 보니 많은 한국인들이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있었다. 가장 유명한 유적이고 방문객도 많아서 다른 유적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기자단은 신발 위에 비닐로 된 덧신을 신어야만 입장을 할 수 있었다. 새롭게 안 사실은, 상해 임시정부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어서 나무통에 배설물을 받아 두었다가 버렸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을 펼쳤던 요인들의 삶은 어느 것 하나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곧바로 민족의 투사 윤봉길 의사가 의거한 훙커우 공원으로 향했다. 윤의사를 기리는 비석 뒤에 윤 의사를 기리는 정자인 매정이 있다. 조선족 여인이 윤봉길 의사의 “사람은 왜 사느냐”로 시작되는 글을 낭독할 때에는 기자단 모두 숙연한 마음에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다음 날 기자단은 「서시」의 주인공 윤동주 시인의 자취가 배어 있는 용정으로 이동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와중에 윤동주 기념관에서 명동 교회, 그 옆의 윤동주 시인의 생가까지 쉬지 않고 이동한 뒤, 그 날 마지막 일정으로 일본 간도 총영사관 건물에 들렀다. 예전에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장소라는 설명을 들으니 가슴 속이 뜨거워졌다.

점점 빡빡한 탐방 일정이 익숙해져 가는 6일차에는 봉오동 승전지에 가게 됐다.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대승을 거뒀다는 봉오동 전투. 그러한 영광을 안고 있는 봉오동 승전지에는 기념비가 근사하게 새워져 있긴 했지만,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가 매우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심지어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서 만났던 한국인은 봉오동 승전지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택시를 타고 우리 기자단이 탄 버스를 따라오기까지 했다.

돌아가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17일에 김좌진 장군이 암살된 장소에 도착했다. 철저해 보이지만 그 속에 인자함이 엿보이는 김좌진 장군의 흉상 앞에서 묵념을 하고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를 부를 때, 우리는 진정한 민족이었다.

하얼빈은 가장 마지막 날에 탐방한 곳이기도 했지만, 평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안중근 의사 의거 장소와 731부대 두 곳이 있어서 특히 기억에 남는다. 복잡한 절차를 걸쳐 들어간 하얼빈 역 내부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탄을 쏜 곳과 이토가 맞은 곳에 표식이 돼 있었다. 유년기 때부터 민족의 영웅이라 생각하던 안중근 의사의 숨결을 느낀 다음 날, 731부대를 방문한 순간 몸의 떨림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러시아 인·중국인 등 식민지 통치로 고통을 받았던 무고한 민족들은 말의 피 삽입·생체 해부 등 참혹한 31가지 실험 대상이 됐다고 한다. 열 개가 넘는 전시실과 일본이 미처 폭파하지 못해 남아 있다는 쥐·벼룩 사육장 그리고 보일러실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지 않는 한국인은 없을 것 같았다.

대학생 기자단이 탐방한 거의 모든 곳은 복원과 보존이 훌륭했다. 비록 새롭게 다듬고 만든 덕이기는 하지만 깔끔한 내부와 당시 상황을 재현하려 노력한 흔적들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그러나 거듭 말했듯이 주인공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또 국내에 있는 독립 유적들뿐만 아니라 국외 유적들도 마땅히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국가보훈처의 천지명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민족과 나라가 없으면 우리도 없다”라는 사실을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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