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씨앗, ‘낙태법 폐지’
변화의 씨앗, ‘낙태법 폐지’
  • 안치형 기자
  • 승인 2017.11.06
  • 호수 1466
  • 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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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홈페이지 ‘국민 청원’ 코너에 등록된 낙태죄 폐지 청원의 참여인은 마감일인 지난달 30일 기준으로 23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이 수치는 국가가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아야 하는 기준인 20만 명을 넘은 수치다.

수면 위로 올라온 ‘낙태죄 폐지’ 
지난 9월 30일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 청원 코너에 ‘낙태죄 폐지’ 관련 청원이 등록됐다.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등록된 이 청원은 “원치 않는 출산은 당사자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청원인은 또한 “현재 119개국에서는 미프진을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다”며 미프진이라는 의약품의 국내 도입도 요청했다. 이 청원의 총참여자는 청원 마감일인 지난달 30일 23만 5천여 명을 돌파했으며, 이에 따라 청와대는 향후 낙태죄 폐지 청원과 관련해 공식 답변을 내놓을 예정이다.

실제로 이들이 국내 도입을 요구하고 있는 경구용 낙태약 ‘미프진’은 아일랜드와 폴란드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시판되고 있다. 미국 역시 12주 이내 낙태만 합법화하고 있으며 의사 처방을 전제로 한 미프진 판매를 허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홍연지<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미프진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초기 낙태방법으로 안전하다고 장려하는 약”이라며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미프진이 불법이라고 명시화된 것이 아니라 낙태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도입이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유명무실한 현재의 낙태죄 법안
낙태가 금지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불법 낙태약 거래가 활개를 치고 있다. 경찰 등 사법당국이 수시로 단속을 벌이고 있지만, 불법 낙태약은 여전히 단속의 눈을 피해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유통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난 8월까지 1만3천890개의 불법약 판매 사이트를 모니터링한 결과. 8천 866개의 낙태약 판매 사이트를 발견했다. 이후 “차단 조치를 취했으나 낙태약 판매 사이트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어 골치가 아프다”고 밝혔다. 

▲ 우리나라의 낙태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높은 편이다. ‘경기연구원’은 최근 한국 가임 여성 1000명당 약 20~25명이 낙태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미국(2013년 15.9명), 노르웨이(2008년 14.5명), 프랑스(2012년 14.5명), 캐나다(2005년 13.7명), 네덜란드(2013년 8.5명)에 비교해 높은 수치다.
 
이처럼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 *사문화된 법이 오히려 불법 낙태를 방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낙태법의 커다란 문제점은 ‘배우자 동의 항목’이다. 현재 임신중절을 하려면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야한다. 즉,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일 경우, 배우자의 동의를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마찬가지다. 

‘낙태법 폐지’를 요구하다
이런 현실에 대해 여성들은 크게 반발했으며, 지난해 9월 낙태죄를 폐지하고 임신 중절 합법화를 요구하는, 일명 ‘검은 시위’를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홍 활동가는 “지난 1953년에 형법이 제정된 이후부터 검은 시위 이전까지는 ‘어떻게 하면 낙태 허용 사유를 늘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중심이었다면 검은 시위 이후에는 낙태법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고 전했다. 홍 활동가는 또한 “단체와 학계 중심이었던 낙태에 대한 논의에 일반 대중 여성들의 목소리와 공감도도 포함됐다”며 “이번 낙태죄 폐지 청원은 갑자기 대두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예전부터 계속된 여성들의 목소리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귀 기울여야 할 23만 명의 목소리
낙태법 폐지 청원이 23만 명을 넘으면서 청와대는 낙태죄 폐지 청원에 조만간 공식 답변을 내놓기로 했다. 이에 홍 활동가는 “청원에 대해 정부와 과거 ‘낙태의 비범죄화’를  주장한 조국 민정수석의 의견이 갈릴지 주목되는 상황”이라며 “진일보한 답변과 함께 실질적인 변화를 위한 단계를 밟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낙태법 폐지와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 확보는 세계적인 추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뉴질랜드 △영국 △이스라엘 △일본 △핀란드 △한국 등 10개 나라를 제외한 25곳에서 임신부의 요청에 따라 낙태가 가능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여성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권리’로 보고 있다. 유엔(UN) 또한 지난 2011년에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합법화하라는 권고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도 낙태법의 폐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23만 명이라는 수치는 낙태 폐지가 나중이 아닌 지금 논의돼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는 여성들은 오늘도 여전히 존재하고,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해 이를 해결하는 문제로 고민을 하거나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들이 적지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낙태를 음성적으로 권장하던 시기와 낙태금지를 실질적으로 고려하는 시기에도 계속해서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사자인 여성의 목소리는 항상 배제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23만여 명의 낙태죄 폐지 청원은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낙태와 관련된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이 왜 낙태를 선택하려 하는지 귀 기울이는 정부의 원론적 접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인포그래픽 임지은 기자 ije9917@hanyang.ac.kr
도움: 홍연지<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사문화: 법령이나 규칙 따위가 실제적인 효력을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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