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 박힌 해석은 예술가에 대한 모독이다
틀에 박힌 해석은 예술가에 대한 모독이다
  • 금혜지 기자
  • 승인 2013.09.28
  • 호수 13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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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적 관점을 벗어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보기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을 보고 나면 가장 강하게 남는 인상은 ‘자연’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흔히 자연 보호, 생태주의가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런 생태주의적 관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굉장히 편협한 해석의 틀에 작품을 가둬놓는 행위이다.

박기수<국문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해석의 틀을 ‘생태주의’로 고정해 놓고 미야자키의 작품을 본다면 그의 모든 애니메이션은 풀빵 찍어낸 듯 같은 것이 돼 버린다”라며 작품이 한 관점에서만 해석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덧붙여 “그는 작품을 통해 항상 자기 변신을 해 왔고, ‘생태’는 소재로써 활용될 뿐 그것이 궁극의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원령공주는 문명에 맞서는 자연일까
흔히 「모노노케 히메」는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중심으로 미야자키 감독의 생태주의적 사상이 절정으로 드러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대부분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 작품을 ‘필사적으로 숲을 지키려는 대자연의 신들과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싸움’으로 소개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모노노케는 인간에게서 버려진 후 견신(犬神)과 함께 자라난 소녀로, 자연을 대표한다고 여겨진다. 반면 ‘타타라바’ 제철 마을의 수장인 ‘에보시’는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대표라고 해석되기 쉽다. 하지만 박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했을 때는 여러 모순점이 발견된다”라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먼저, 자연의 수호신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시시신’은 사실 자연만이 아니라 ‘생명’ 전체를 관장하는 신이다. 인간 대 자연의 구도에서 자연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주관한다.

타타라바 마을이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상징이라면 이는 부정적으로 그려졌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오히려 축제에 가까운 모습이다. 남자들은 운송하고 여자들은 노동요를 부르며 농상 공동체를 이룬다. 부족장인 에보시는 문둥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일거리를 준다. 바깥 세계와는 다른 그들만의 마을 공동체를 이뤄가고,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문명’의 파괴적인 코드와는 맞지 않는다.

「모노노케 히메」에는 이분적인 사고로 바라보기에는 매우 다각적인 갈등 관계가 나타난다. 타타라카 마을은 중앙정부의 막부들과 남자 주인공 ‘아시타카’의 부족과도 갈등 관계를 이루고 있고, 한 마을 안에서도 남녀로 나뉘어 갈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심지어 자연계 내에서도 들개와 멧돼지들이 갈등 관계를 이룬다.

이 작품의 주제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었다면 어느 한 편이 멸망하는 쪽으로 결말이 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전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문명이 멸망하고 자연이 다시 싹트는 과정이 아닌 그 후의 모든 ‘생명’들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에보시는 남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라며 재건의 의지를 보이고, 아시타카는 모노노케에게 “너는 이 숲에서, 나는 저 숲에서 살아가자”라고 한다. 이 셋 중 뚜렷한 악인은 없으며, 완전히 멸망하는 사람도 없다. 이것이 이 작품을 윤리적인 관점에서 ‘자연의 위기와 문명의 대립’을 묘사했다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에 대한 의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이 작품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논문 「모노노케 히메의 스토리텔링 전략」에서 “고유한 가치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캐릭터들 간의 관계, 그 자체가 오히려 주제에 가까운 지점이다”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미야자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정말 좋은 영화를 보고 마음속에 남는 것은 ‘사는 것은 대단하구나’라는 느낌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작품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이웃집 토토로」를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마을의 큰 나무에서 사는 ‘토토로’는 자연을 상징하고, 주인공 ‘사스케’와 ‘메이’는 자연과 어울리는 순수한 주인공들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토토로를 자연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약적인 것일 수 있다.

사실 「이웃집 토토로」는 애니메이션 본래의 재미를 찾아주겠다는 의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의 본질, 즉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무성영화, 초기 디즈니 작품처럼 움직임 자체를 통해 즐거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박 교수는 “단지 등장인물들의 율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움직임 자체가 즐거움을 주는 요소일 뿐, 오히려 스토리 자체는 매우 약하다”라고 이 작품을 평가한다. “토토로를 자연에서 온 아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오히려 일본의 신도 사상이 잘 드러난 생물로 해석하는 게 맞을 듯하다”라며 “이 애니메이션은 1950년대 일본 농촌의 풍경을 전제로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했다. 덧붙여 「벼랑 위의 포뇨」 또한 서사는 약하지만 움직임의 즐거움을 극대화한 작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전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과거의「모노노케 히메」, 미래의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로 대표되는 여자 메시아 모티프의 현재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아주 쉬운 문제조차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현대 일본 10대들의 무기력함을 모험과 일본 전통 사상을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자연 중심적이라고 해석될 만한 부분은 쓰레기를 토하는 오물 신의 모습인데, 이는 현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무기력증의 문제를 집약해서 보여준다고 해석하는 편이 낫다.

미야자키는 완성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보드와 동시에 영상을 진행하는 감독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스토리텔링 부분에서 체계적이고 구조적이지는 않지만 큰 감동을 준다. 박 교수는 “생태주의적 관점은 소재를 중심으로 미시적인 작품 분석을 하는 것이다”라며 “그의 작품은 아주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고, 그의 스타일을 한정시키기보다는 작품마다 당대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정당한 평가가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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