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
  • 정혜원 기자
  • 승인 2013.03.30
  • 호수 13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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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희를 사랑한 남자,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궁궐에 소속된 무희들 중 한 사람이 빼어난 미모로 유난히 돋보였는데 유럽인이 보기에도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한 젊은 대리공사가 그 여인의 우아한 매력에 완전히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그는 고종에게 그 무희를 자신에게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왕은 이를 너그럽게 허락했다.’  

제2대 조선 주재 프랑스 영사 및 전권공사를 역임했던 이폴리트 프랑댕(이하 프랑댕)은 「한국에서」 라는 책에 프랑스 남자와 조선 여인의 비극적 사랑을 담았다. 1905년 출간된 이 책은 프랑댕이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의 문화와 풍습, 일상생활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서」에서 등장하는 프랑스 남자는 제1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폴랑시(이하 폴랑시)’로 프랑댕의 친구였다. 폴랑시와 사랑에 빠졌던 조선의 여인은 ‘이화심(이하 리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궁 소속의 무희로 ‘리진’ 혹은 ‘리심’으로 불렸다. 리진은 조선 구한말 왕실 소유의 무희였으며 프랑스 대리공사의 연인이었고 최초로 유럽 땅을 밟은 조선 근대 여성이었다.

▲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의 모습이다.
플랑시, 리진을 만나다
주한 외교관들 중 대리공사의 직함을 처음 받은 사람은 콜랭 드 플랑시로 한국과 프랑스가 외교관계를 맺은 1886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당시 플랑시는 양국에 조약 비준서를 교환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1890년 어느 날 프랑스에 파견된 초대공사와 외국인 관계자들은 조선왕궁으로 초대를 받는다. 이때 조선왕궁에 소속된 무희들의 공연이 열렸고 리진이 플랑시의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에 따르면 고종의 선처로 그 무희는 플랑시와 함께하게 됐고 리진과 플랑시는 급속도로 사랑에 빠졌다.

플랑시는 주한 대리공사 임기가 끝날 무렵 고심 끝에 리진과 떨어져 지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플랑시는 리진을 프랑스로 함께 데려가기로 결심하고 1893년 5월 4일 리진과 플랑시는 파리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이후 한국을 떠나 유럽에 도착한 플랑시는 리진과 결혼식을 올리고 리진은 최초로 유럽 땅을 밟은 조선 여인이 됐다. 포르냉 <트르아 예술 역사 박물관 유물 담당> 부인은 젊은 한국 여인의 도자기 상을 소개하며 “플랑시는 조각가 클레르제에게서 이 한국 여인상을 선물 받고 죽는 날까지 이 조각상을 간직했다”고 전했다.

조선의 무희, 파리 문화 한가운데 서다
▲ 플랑시가 수집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무희들의 사진이다
당시 파리는 문화적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문화와 예술이 꽃피웠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웠다. 물질문명과 더불어 리진을 깨우친 것은 ‘파리의 지성’이었다. 플랑시는 가정교사를 들여 리진이 불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리진은 학습속도가 빨랐으며 그 적응능력에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 리진은 불어를 통해 프랑스적 가치를 알아갔고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KBS 「한국사 전(傳)」 ‘리진’ 편에서 함민재 신부는

“이 당시 그리스도교는 여성들에게는 본인들 개개인이 고유한 인격을 가진 개별적인 독립체라는 것을 인식 시켜줬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 하나의 인격으로 대우 받지 못했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조선의 여인은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부인으로만 역할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후 파리에서 리진은 예술가로서 숨은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리진은 파리의 사교모임에서 상류계층과 자주 어울렸고 많은 프랑스인들을 만났다. 어느 자리에서나 리진은 돋보였고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었다.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
하지만 리진은 급속도로 우울해하기 시작했다. 리진이 어느 순간부터 파리의 여성에 비해 조선의 여성을 작고 초라한 존재로 봤기 때문이다. 서양인의 육체적인 모습부터 정신적인 모습까지 파리를 동경하면 할수록 조선은 미약한 나라가 됐다.

「한국에서」 는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 앉은 이 가련한 한국 여인은 너무나 야윈 나머지 마치 장난삼아 여자 옷을 입혀 놓은 한 마리 작은 원숭이 같아 보였다”라고 리진을 묘사했다. 힘들어하는 리진을 위해 플랑시는 파리에 한국식 규방을 만들었다. 그러나 플랑시의 노력에도 리진의 우울증은 악화돼 갔다.

결국 파리에 온지 4년 만에 리진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다. 1896년에 플랑시가 주한 프랑스 3대 공사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리진은 더 이상 플랑시와 함께 지낼 수가 없었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리진이 고위관료에게 끌려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는 “리진이 돌아간 곳은 왕실무희단”이라고 밝힌다. 왕실무희단에 소속된 무희는 사실상 노비의 신분으로 자유롭지 못한 몸이었다. 하지만 파리의 근대를 경험한 리진은 무희의 삶을 견딜 수 없었다. 이 가련한 조선의 무희는 결국 금조각을 삼키고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참고 : KBS 「한국사 전(傳)」 ‘리진’ 편
도서 「한국에서」, 「리진」,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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