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 카이거 감독, 과거에서 미래를 찾다
첸 카이거 감독, 과거에서 미래를 찾다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08.31
  • 호수 13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같은 삶, 삶 같은 영화
▲ <첸 카이거 감독>
마오쩌둥의 급진적 정치혁명이 끝난 후 1982년 다시 문을 연 베이징문화학교의 첫 졸업생들, 마오쩌둥의 정책을 체험한 이들을 중국의 5세대 감독이라 한다. 첸 카이거 역시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영화 「패왕별희」 등에서 작품성,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고 큰 성공을 거뒀다. 우리나라에선 특히 배우 장동건과 함께 작업한 「무극」으로도 유명하다.

화려한 필모그래피만큼이나 그의 인생 역시 파란만장하다. 그는 1952년 북경의 영화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화감독이었고 어머니는 영화 시나리오 편집자였다. 청소년이 된 첸 카이거는 당, 정부, 군 간부의 자제들이 경쟁하는 일류중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이미 사회 전체적으로 공산당 국가지도자였던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가 시작되던 때였다. 학생들은 여러 방법으로 마오쩌둥을 찬양하며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마오쩌둥과 당에 대한 사랑은 점점 더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가치로 추앙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학생 첸 카이거는 담임선생에게 “너의 아버지는 공산당원이 아니다”란 말을 듣는다. 담임선생은 이에 덧붙여 “그러나 가정을 부담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며 첸 카이거에게 “공부를 잘하고 성적도 좋지만 그렇다고 우쭐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당시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산당원일 것이라 생각했던 첸 카이거에게 이는 충격이었다. 사실 첸 카이거의 아버지는 19세 때 항일 운동과 관련해 국민당에 가입했던 적이 있었다. 이후 아버지는 국민당의 부패를 비난하며 국민당을 반대하는 운동에도 참여했으나 ‘가입 전적’ 때문에 여전히 공산당에 가입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첸 카이거의 충격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다. 어린 학생들로 조직된 홍위병을 주축으로 모든 파괴 행위가 시작됐다. 홍위병은 첸 카이거의 학교에도 있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선생을 교탁 위에 세워 모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 중엔 첸 카이거에게 부모가 공산당원이 아님을 알려줬던 선생도 있었다. 학생들은 무리를 지어 교내를 휘젓고 다니며 교사들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폭력을 일삼았다.

첸 카이거의 가정, 특히 그의 아버지도 홍위병들의 분노 표출 대상이었다. 어느 날 첸 카이거의 아버지는 ‘국민당 분자’, ‘그물에 걸린 우파’라고 적힌 어깨띠를 매고 집 앞에서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때 누군가 첸 카이거의 이름을 호명한다.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문화대혁명 당시 비난당하는 한 인물

『나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내가 무엇을 지껄였는지 기억이 없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내 쪽을 힐끗 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어깨를 손으로 내질렀다. 어느 정도 힘을 넣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렇게 세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아버지를 밀어 넘겼다. …(중략)… 아버지는 피하려 했으나 도중에 그만 두고 허리를 더욱 깊이 꺾을 뿐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은 쾌감으로 달아오른 불길 같은 시선이었다. …(중략)… 그렇지만 열네 살 나이에도 내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 된 일일까. 나는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다음 날 아침 첸 카이거의 아버지는 연행된다. 이후 그는 수많은 수난을 보고 겪는다. 평소 그의 집에 놀러오던 친구들이 홍위병이 되어 가택수사를 오기도 했고 가까운 친구는 징역을 살기도 한다. 첸 카이거와 마찬가지로 운남성 농촌으로 하방운동(간부들을 농촌 등의 노동현장에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한 것)을 왔던 여학생은 강간을 당해 미쳐버리기도 한다. 그 시기 수많은 고급지식인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고난의 세월을 경험한 감독 첸 카이거. 결국 그의 삶은 영화 속에 녹아들었고 그 영화 속엔 누구도 무시 못할 고단한 역사의 기억이 담겼다. 그의 영화가 삶을 닮아있고 그의 삶이 영화를 닮아있는 이유다.

참고: 저서 「나의 홍위병 시절: 어느 영화 감독의 청춘」, 논문 「인생경극: 영화 <패왕별희>의 상징성」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