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한대신문 문예상 가작상
제38회 한대신문 문예상 가작상
  • 취재부
  • 승인 2005.12.06
  • 호수 12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설>

                                                굳바이 조르바

                                                       임태우<공대 전자전기 01>

 

 

죠르바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그것을 눈치챈 사람이 있다면 영원한 친구인 나 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경의를 표한다

 

「죠르바,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난 것이죠?」

「글쎄요, 두목. 그 동안 지나온 시간들이 너무 까마득해서 말이죠, 그래서 이 늙어 비틀어져버린 심장이 놀라서 멈춰버리지 않을까 두렵군요. 이제는 나도 정말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마음에도 없는 약한 말을 내뱉느냐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결코 이상한 건 아니에요. 단지 쇠약해진 육체가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일 뿐이죠. <넌 이제 진짜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자, 어떻게 할래? 어떻게 발버둥칠래?>」

「우린 정말 오랜 만에 만났어요. 어쩌면 죠르바 당신을 포함해서 눈 앞의 모든 것들이 대낮의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 꿈일지도 모르겠죠. 그런데 너무나 그리웠던 해후의 인사 치고는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요?」

「여전하군요, 두목. 당신은 정말 손끝 하나 안 댄 돌무덤처럼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변하지 않기로는 사실 이 죠르바도 마찬가지죠. 비록 늙어버린 육체는 내 말을 자꾸 거역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내 안에서 오기가 발동하고 있어요. 편하게 눈감고 세상을 하직하는 따위의 그런 죽음은 내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물론 그러다가도 마음 속에 한없이 평화로운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죠. 사실 두목. 난 이 순간을 몹시 기다렸어요. 간밤의 내 꿈 속에서 계집의 새하얀 엉덩이를 밀쳐내고 두목의 얼굴이 나타났다고 하면 믿겠어요? 하지만 난 그 때마다 마음 속으로 맹세를 했어요. 언젠가 이렇게 두목을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결코 내 지난 과거를 주절 주절 늘어놓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그런 식으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되새김질 하는 짓 따위는 나중에 관 속에 편안히 누워서 해도 충분해요.」

죠르바와 내가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에서의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므로 좀 더 순간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습관을 갖는다면 최소한 쓸데없이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내던져버리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문득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무척 흥이 겨워졌다. 무슨 일이라도 그와 함께 다시 시작한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다시 말해 삶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지금 나와 죠르바가 서있는 곳은 한양대학교 정문이다. 스산한 가을 바람이 찾아오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도동 철거 문제로 철거민들이 천막 시위를 하던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간혹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하릴없는 서성거림만 눈에 띌 뿐이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기다림의 시간들은 달콤하면서도 때로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이기도 하다. 그 기다림의 성격이 절박할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기다림의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기다리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현실에 낙담해버린 이들은 간혹, 목숨을 끊기도 한다.

탈출에 목말라하는 이들. 지독한 기다림의 운명에서 벗어나고픈 이들. 하지만 세상은 오히려 그들에게 끊임없이 갈증을 일으키는 기제들로 무장하고 있다. 억압을 당하는 어느 한 무리가 있으면 억압을 하는 다른 무리가 있다. 쫓기는 무리가 있으면 쫓는 무리가 있다. 언뜻 보면 적자생존의 논리에 그대로 노출되어버린 날 것의 세상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들이 때로는 개개인들에게 체화되어 더욱 진화하고 견고해진 형태로 거듭난다는 사실이다. 미약한 한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거대한 조류 속에서 가령 한 송이의 꽃을 피운다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는 것일까?

「죠르바, 당신은 학교를 다녀본 적 있나요?」

「방금 학교라도 말씀하셨나요? 하하, 두목, 세상에는 정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학교가 존재하고 있어요. 좀 전에 내 발끝에 걷어 차인 저 못 생긴 돌멩이도 그냥 하나의 학교라고 해둡시다. 사실 나는 어딘가에 얽매이는 방식을 선천적으로 잘 해내질 못해요. 간혹 학교 건물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과연 저 학교라는 곳을 다니는 사람들과 한 번도 학교를 다녀보지 못한 나라는 인간이 얼마만한 차이가 있을까. 두 팔 두 발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달린 이 죠르바가 그들에 비해 못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보다 더 뛰어난 점들도 제법 많아요. 왜냐하면 그들보다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죠.」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대부분을 학교라는 곳에서 보냈죠. 학교에는 수많은 지식들이 있고 인간이 수 천년 동안 쌓아온 고유의 문화 양식들이 전해오고 있죠.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지식을 습득하고 주변의 인간 사회에 대한 이해를 차츰 넓혀가요. 개중에는 지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우쭐함에 빠져서 세월을 낭비하는 이들도 있지만요. 하지만 학교라는 것은 분명 지식의 세계를 확장시켜주지만,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경험 세계가 지닌 가능성이나 폭을 제한하고 있다는 일말의 아쉬움 같은 것이더군요. 그러니까 이제 와서 괜스레 오랜 학교 교육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듯한 씁쓸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나는 말이에요, 두목. 여태껏 살면서 학교라는 곳은 근처도 얼씬하지 못한 놈이지만 이 한가지만은 굳게 믿고 있어요.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자연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는 법이지요. 자연? 뭐, 그런 게 별건가요? 자연이란 게 산, 나무, 개울물 이런 것들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계집이랑 정열적으로 섹스도 해보고 하룻밤 놀음으로 큰 돈도 따보고, 아니 모조리 잃어서 찬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하고 너무나 갖고 싶은 물건을 보았을 때 쿵쾅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슬쩍 소매치기를 해보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 말은 섹스, 도박, 사기 같은 쓰레기 같은 짓거리들도 결국은 하나의 자연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나는 그런 것들을 어느 누구로부터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사실 그런 것들은 배워서 아는 게 아니에요, 단지 <자연>만이 그렇게 하는 법을 넌지시 귀띔해주었을 따름이에요. 젊었을 적에 한 때는 위악적인 포즈에 빠져서 쓰레기 같은 짓거리만 골라서 하고 다닌 적이 있어요. 하루는 늦은 어스름한 시간에 쿠반이라는 동네 어귀에서 돌아오는 행인 녀석을 신나게 패주고 보따리를 빼앗은 적이 있죠. 제법 돈이 많이 들은 보따리였는데, 그걸 가지고 한 탕 재미있게 즐기려고 시내에 있는 어떤 지하 주점에 들렀어요.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라 간신히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럼주를 한 잔 시키고 나니까 어떤 테이블에서 콧수염을 잔뜩 기른 러시아 녀석이 요란 법석을 피우면서 매우 호탕하게 놀고 있는 것을 보았죠. 그 모양이 주위 사람들에게 뭐라고 일장 연설을 하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서 들어보니까 무슨 러시아 혁명에 관한 이야기 같았어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 러시아 친구와 밤을 지새워가며 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나는 그날 밤 강도 짓을 해서 빼앗은 돈을 모조리 써버렸어요. 그렇게 돈을 다 써버리고 돌아와 혼자 낡은 여관집 침대에 누워서 생각을 했죠. 사람은 자연에서만 놀 수는 없는 법이라고. 나는 그날 밤 혁명에 대한 열정을 처음 느껴본 것 만으로도 전혀 쓸쓸하지 않았어요. 가슴 밑바닥부터 차 올랐던 그 느낌은 마치 고귀한 특권 의식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군요. 두목, 내가 예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크레타에서 강도 약탈을 하면서 악랄하게 금화를 끌어 모았다던 짐승 같은 녀석이 있었는데 별안간 크레타의 독립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금화를 뭇 사람들을 향해 뿌렸다던 이야기 말이죠. 인간은 참으로 별난 존재이죠. 어느 한 가지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나는 그냥 곧이 곧대로 이해하기로 했어요. 사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지 않아요, 두목?」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사실 인간은 빵 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은 빵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인간은 결코 빵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빵 이상의 존재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한 사실은 아닐 것이다. 남들보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고 해서 그것이 결승점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존재를 정말로 알기 위해서는 아직도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죠르바, 우리 같이 학교 위로 올라가보지 않겠어요?」

학교가 자리한 동산은 옛날 나의 꿈을 묻어두었던 크레타의 광산보다는 크기가 조금 작았다. 아직까지도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행동으로 옮기는데 있어서 큰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세월의 무게 탓에 자연스레 삶에 대해 겸손해진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도 지난 세기 동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혁명에의 좌절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덧 내게 억압의 역사가 되어버린 탓이 더 크다.

나와 그는 어깨를 나란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늘어지 빨갛게, 혹은 노랗게 단풍이 물들어가는 가지들마다 각각 선명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당에는 한산한 가운데 농구를 하는 무리들이 활기를 더하고 있었고 간혹 남, 여학생들이 서로 담소를 하며 어디론가를 향해 소소히 사라졌다.

교정은 늘 한결 같은 모습을 유지하도록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 같다. 처음 대학에 입학해서 이 교정을 바라보았을 때나 수년이 흐른 지금이나 어떤 정형화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남이 없다. 농구를 하고 족구를 하고,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농담하거나 남녀 학생들끼리 번갈아 재미있는 화제거리들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또는 가방을 둘러메고 서둘러 강의실을 찾아가는 모습들. 흔히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캠퍼스의 풍경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떤 공식처럼 간단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들이다. 비록 그러한 공식을 일일이 외거나 의식하면서 살지는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사회를 이루는 공식의 일부가 되어 정형화된 풍경의 하나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는 <보편적인 삶의 양식>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앞서의 <공식>이라는 것도 결국 사회를 이루는 질서에 다름 아니므로 인간의 활동도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테두리를 벗어난 활동이란, 그저 무의미한, 미치광이의 행동으로 업신여김을 받게 될 뿐이다. 사회는 그렇게 우리들을 보이지 않게 억압하며 스스로 진화하고 있다. 보다 효율적인 감시 체제를 향해, 보다 체계적인 사육 체제를 향해.

「두목, 학교를 다니는 이 곳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살고 있는 건가요?」

「글쎄요,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는 노릇이죠. 물론 <평균적인 생각>이란 것은 있을 거예요. 극단적인 선호나 위험을 즐길 줄 아는 사람보다는, 중도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요, 하지만 정작 자신 스스로와 연관된 진정한 의미는 그 자신도 잘 모를 때가 많아요.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살지만 그것은 단지 어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질 뿐이지요.」

「그렇군요. 나는 이 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학교라는 곳은 단지 책만 옆구리에 낀 채 무언가 사색을 하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생각해내지 못해 끙끙 앓는 곳이라 생각했어요. 두목을 따라 학교란 곳에 올라왔지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알 수 없는 이질감들 때문에 당혹스럽군요. 두목, 저들을 보세요, 하나 같이 무척이나 답답한 표정들이에요! 이런 곳에서 마음껏 춤을 출 수 있을까요? 과연 이런 곳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학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맞아요. 사실 그건 애초부터 잘못된 일이라구요. 설마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발견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가리지 말고 떳떳하게 말해봐요, 두목. 대체 학교를 다니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늙은이 죠르바처럼, 못 생기고 냄새 나는 창녀 계집들과 궁상 떨며 노는 게 싫어서, 또 검댕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갱도를 찾고 갈탄 따위 캐는 일이 싫어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지저분한 벙거지를 걸친 채 걸인처럼 유랑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두목이 인정한다 해도 나는 두목에게 실망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두목은 둘도 없는 나의 친구니까. 나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인생의 동반자니까요.」

「만약 죠르바 당신에게 어떤 단점이 있다면 그건 늘 맞는 말만 한다는 점일 거에요.」

인문대로 향하는 138 계단을 오르는 길은 가뿐했다. 힘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최소한 계단 하나를 오르기 위해 들여야하는 노력은 그나마 정직하다. 노력에 비해 댓가를 더 많이 받거나 적게 받을 우려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의 정직함이 좋았다. 그건 내가 정직해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내 스스로 정직하지 못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난 내년이면 학교를 졸업하게 될 것이다. 졸업은 분명 새로운 국면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전혀 새로운 고민들, 걱정들이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새파란 가을 하늘 위를 가리우고 있는, 저 취업 관련 현수막들은 바쁜 몸짓으로 어서 현실 속에 안주하기를 재촉하는 것만 같다. 가끔은 나의 실존이 저 현수막들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워짐을 느껴 갑작스런 공복감에 헤맸던 적이 있었다. 허전한 건 정신인데 그것을 육체의 포만감으로 서투르게 대처해버린 부자연스러웠던 나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든 설명할 길은 없었다. 때때로 등가로 치환될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으므로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을 가질 뿐이다.

사람에게 현대적인 느낌의 아주 세련된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마치 정기 승차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자유 따위를 믿는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 팔 수 있는 무형의 권리처럼 허용된 범위와 기한이 표기되어 있고, 또 조건이 따라 붙어야만 비로소 선택의 자유를 얻었다고 인정하게 된다. 그런 것들에 이미 익숙하므로 자유의 의미에 대해 구태 의연히 물을 필요는 없다. 그저 적절한 선에서 만족하고 즐길 줄 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인생의 큰 축복이자 즐거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 거리낌없이 자유를 즐긴다고 착각에 빠져도 그만 좋은 것이다. 때론 누군가가 그건 하나의 사치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손가락질 해도 영원히 좋은 것이다!

학교는 그런 면에서 자유에 대한 매우 안전한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 캠퍼스 안에서의 자유, 학생 때의 자유로움을 누구나 그리워한다. 인생에서 한번쯤 학교를 거쳐갔던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한다. 이미 <보장된 자유>에 대해 사람들은 친숙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 세계를 서로 비교해보면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다.

「죠르바, 혹시 이런 것을 생각해본 적 있나요? 아주 미세한 차이의 점수로 1년을 허비하게 되는 사람들의 심정 말예요. 만약, 그런 허탈함 뒤에 찾아오는 분노는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일까요? 누구를 향한 것이어야 할까요?」

「그건 마치 세상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놓은 하나님에 대해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이 느껴지는군요, 두목?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난 뒤에 행동을 하는 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어느 날 성모 마리아가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사실 눈깜짝하지 않을 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마음 편하게 믿어버리는 것도 바보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사람은 나약한 존재에요. 별거 아닌 자극에도 금세 흥분되거나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도 사람이 아니면 할 수도 없는 일이구요. 대체 그 소수점이라는 것은 누가 발명했답니까, 두목?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지독했던 구두쇠 녀석의 머릿속에서 나온 발명품일 거예요. 정말 무언가를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어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왜 자꾸 이해하려고 하는 겁니까?」

「당신 말대로 나는 세계가 이런 식으로 밖에 창조될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난 그저 하나님이 이런 세상을 주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솔직히 하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잖아요? 그 이상은 골치만 썩을 뿐이죠. 무언가 당장 필요하다면 손짓, 발짓 다 동원해가며 제스처를 취하면 되는 겁니다. 울부짖고 날뛰면서 춤추는 것과 똑같이 말이죠. 죠르바는 작자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으니 내가 날 말리지 않으면 누가 날 말리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순 없어요. 어떤 때는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날 말리려고 했지만 내가 뿌리쳤지 뭡니까? 하나님이 엉터리로 만든 부분이 있으면 당장 뜯어 고치고 나중에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면 되죠. 그런 식으로 교감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내가 하나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나는 가볍게 머리를 내저었다.

요즘 취업을 위한 영어 점수에 끈질긴 집착을 보이는 내 모습에 대해 문득 문득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 내 머릿속의 일부가 기계 회로로 대체되어 버린 듯한 이물질감은 썩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정체성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훼손되어버린 것 같아서 억지로 이전의 내 모습을 기억해보려 애쓰기도 했다. 옛날에 내가 써놓았던 글들, 메모들을 다시 읽어보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써놓은 것 마냥 너무나도 생경해서 변해버린 지금의 내 모습이 후회스럽기까지 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나의 조각들을 과연 어디쯤에서 잃어버린 것일까.

「혹시 누군가를 원망해본 적 있나요?」

「글쎄요, 두목. 난 지나간 일들, 감정들을 오래 담고 있진 않아요. 너무 거추장스럽거든요. 한 번 호탕하게 웃고 끝날 수 있는 일들, 솔직하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일들, 눈 딱 감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일들. 이렇게 단숨에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누군가를 원망해본 적도 많았지요. 하지만 내 머리가 그런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다니는 장부 뭉치도 아니잖아요?」

「...」

「사실 조금 전에 한가지 불만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우리가 만나기 전 저기 아래에서 두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끔하게 보이는 아가씨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니겠어요? 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주책스럽게도 양 볼에 한껏 미소를 품고 그 아가씨가 무슨 말을 건네나 하고 귀 기울였더니 글쎄, 나더러 교회를 같이 다니자는 겁니다. 내 참. 처음에는 그 모양이 너무도 간곡해서 꿈뻑 넘어갈 뻔 했죠. 감미로운 주술에 걸린 것처럼 덜 떨어진 목소리로, <그래요, 한 번 가봅시다!> 라고 나도 모르게 외치려고 했었다니까요! 근데 바로 그 찰나였어요. 금세 바로 내 몸 안에서 강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던 겁니다. 아주 짧은 시간의 울부짖음 같은 것이었죠. 난 내 몸의 울음 소리를 똑똑히 들었어요. 그래서 곧바로 정신을 차렸죠. <아가씨, 나는 교회에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난 교회에 갈 수 없다고 스스로 맹세를 했기 때문이에요. 그 맹세는, 비록 술김에 내뱉은 다짐이었지만 내게는 절대적이죠. 교회에 가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쓸데 없는 거짓말들을 늘어놓게 되요. 그래서 가끔은 얼토당치 않은 내 거짓말에, 하나님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시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실 학교 안에는 교회 다니기를 종용하는 무리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유독 학교에 많다는 사실도 그렇고, 첩보 영화처럼 어디선가 소리 없이 나타나 말을 걸어오는 그들을 볼 때면 하나님이 대리인을 통해 날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혹시 본질과 비본질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이를 테면, 하나님과 단지 교회를 다니는 것의 차이 같은 것 말이에요.」

「두목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놀라운걸요? 교회를 다니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거예요. 엄숙한 표정과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한껏 달아오른 흥분된 몸과 마음으로 찬송을 하고 때로는 꾸짖고 설교를 하려 드는 것도 다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권리이고 자유이죠. 그리고 각 교회들마다 서로 상대편 교회에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하면서 서로 싸우는 것도 한심하게 보이지만 어쨌거나 그것들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건 인정해야겠죠. 하지만 그들은 자기 최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정작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들을 지껄이고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 만이 알 수 있는 선악의 판단 영역들도 그들의 잣대에 맞춰지고 있어요. 결국 그 놈의 이기심이 문제죠. 보기도 싫은 성경책을 눈 앞에 펼쳐 보이며 설교를 하려 들고, 사사건건 남의 은밀한 욕망을 감시하고 간섭하려 들고, 있지도 않은 내 죄를 스스로 고백하라고 떠밀고 있으니, 나 원 참! 그러니까 내가 아까 그 아가씨에게 교회에 가면 거짓말 밖에 못한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예요.」

「세계는 본질적인 부분과 비-본질적인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요. 어쨌든 본질 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다면 커다란 오류를 저지를 수 밖에 없죠. 그만큼 생각이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에요. 마치 독재자들이나, 또는 거짓 선지자들처럼요.」

어느새 인문대 앞 벤치에 다다랐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처음부터 어떤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걸어온 만큼 나중에 가서 특별히 후회할 일도 없을 것이다. 단지 죠르바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정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셈이므로 무언가를 더 바란다는 것은 필요 이상의 노동처럼 느껴졌다. 약간의 피로감이 들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두목은 늘 생각이 많아요. 두목을 바라보면 마치 잔뜩 구름이 낀 잿빛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아직도 책 쪼가리 속에서 목마름을 느끼고 구원을 찾고 있는 거죠?」

「물론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책 속에서 책 이외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요즘 들어 책을 읽을수록 까닭 없는 패배감이나 기습적인 낭패감에 몸서리가 쳐지곤 해요. 자신감이 차츰 하나 둘 붕괴되어가는 과정이죠. 어쩌면 내가 속한 <문화> 속에서 점점 소외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두목의 <언어>는 많이 왜곡되어 있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나요? 솔직히 난 두목이 하는 말을 절반도 채 알아들을 수 없어요. 때때로 강한 거부감 같은 것이 두목의 언어가 내 귓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도 해요. 간단히 <일 더하기 일은 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까? 그것을 인정하고 용납한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가능성이 깡그리 폐기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요, 죠르바. 가능성은 언어 표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죠. 내가 어떤 언어를 선택하기 훨씬 이전부터 가능성의 영역은 내 의지까지도 내포하고 있어요. 확실히 난 언어의 노예에요. 특히 그것을 책을 읽으면서 느꼈어요. 내가 지금까지 쏟아냈던 모든 말들은, 이전에 존재했던 텍스트들의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아요. 나라는 <주체>는 사실상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게죠. 리얼리즘은 이미 현실을 떠나 환상이라는 우리에 갇혀버렸어요.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아무도 그것이 자신의 진짜 현실이라고 두 눈 크게 뜨고 직시하지 않아요. 모두들 드라마,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데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탓이죠.」

「그런 건 다 쓸데 없는 생각입니다, 두목.」

「죠르바, 난 당신을 5년 전 카잔차키스의 책 속에서 만났어요. 처음 만났을 때 당신에게 호감을 가졌고 당신에게서 나의 은밀한 구원을 찾기도 했죠. 하지만 당신은 어디까지나 <책 속의 가상 인물>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사이의 우정은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왕관처럼 길이 빛나도록 영원할 수 있었던 것이죠. 내가 구원을 찾는 방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

영영 헤어날 올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갑자기 힘이 빠졌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다. 오히려 원점을 거슬러 마이너스의 영역으로 빠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죠르바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그의 깊게 팬 이마 위 주름 속에서 미세한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여러 가지 혼란스러움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리라.

그는 이내 말문을 열었다.

「두목,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겠어요, 왜냐하면 나는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 그리고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어 온 것 모두 확실한 것들이고 또 인간의 언어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인데도 굳이 불만을 가지는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꼭 변덕스런 계집의 뾰루퉁한 불만처럼요. 새 소리나 바람 소리 같이 이해를 하지 못해도 즐거운 기분이 드는 언어가 있는가 하면, 괜시리 울적한 기분이 드는 언어도 있는데 두목이 바로 그 짝이로군요. 스스로 괴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동시에 주변 사람을 쓸데 없이 괴롭히는 일이기도 해요. 그런 점은 분명하게 알아 두셨으면 좋겠군요.」

<언어적 정체성>이란 말이 있다. 일단 정체성이란 언어적 기반 위에 세워진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언어가 주체를 규정하는 특수한 방식들에 주목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일 것이다. 난 내가 기대고 있는 언어적 기반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의 기호에 의해 취사 선택된 언어들은 어느덧 나를 구성하고 나를 말하고 나를 듣고 나를 쓴다. 주어는 늘 괄호 안의 빈자리로 남아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  )은 나를 죽음으로 서서히 이끌고 있다. (  )은 나를 발버둥치게 한다. (  )은 나와 나를 구별 짓는다. 때때로 괄호 안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왜냐하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기표뿐인 존재들이므로.

「당신 말대로 나는 아직도 구원에 집착을 하고 있어요.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부질 없는 행동만을 반복할 뿐인데도 말예요.」

「두목, 누군가가 정말로 당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차라리 저기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를 믿으세요. 아니면 저기 저 듬직하게 생긴 비석을 믿으시던지. 생각해보면 구원이 될 만한 것들은 정말로 많아요. 혹시 여자의 풍만한 가슴 속에 파묻힌 구원을 찾아본 적 있나요? 하나님도 날 구원할 수는 없을 거예요. 만약 하나님이 내 앞에 와서 구원하겠다고 하시면, 난 <아이고, 하나님, 천당에서는 여자랑 벌거벗고 침대 위에서 뒹굴 순 없지 않습니까? 럼주 한 잔 들이키고 미친 듯이 산투리를 켤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하나님, 저에겐 천당이 곧 지옥입니다. 이제 그만 제발 절 내버려두세요.> 라고 정중하게 사양할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단지 일상 속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전혀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 말고도 구원을 찾는 사람들은 거리에 널려있을 정도로 많다. 현세에서의 구원은 물론, 내세에의 구원까지도 마치 호텔 룸 예약처럼 각자의 기호와 스케줄에 맞추어 구원의 방식을 선택한다. 나는 언어 속에서 구원을 찾으려 노력했고 지금도 동일한 방식을 통해 노력하고 있다. 아마도 언어 자체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로부터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난 구원 자체가 아닌, 그것의 불가능함을, 불가능함이 지닌 비장함을 사랑했던 것일까.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단지 신화 속에 속한다면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영혼이 없는 피노키오는 말 그대로 죽은 존재란 말인가.

「죠르바, 이제 내려갈까요?」

「어디로요?」

「우리가 왔던 곳으로요.」

비록 잠깐 스쳐가는 슬픈 생각이지만 세계의 이치를, 삶의 원리를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온전히 깨달았으면 좋겠다. 피노키오는 생명을 얻기 위해 기나긴 여행을 했지만 나는 그럴 만한 용기도 없을 뿐더러 최소한 어디로 가야 되는지조차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 모든 사건들이 막 태동하기 시작했던 신화적 장소뿐이다. 빅 뱅 이론 이후 우주가 지속적으로 팽창할 것인지 아니면 언젠가 수축하기 시작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 전우주의 질량을 재기 위해 쏟아 부었던 과학자들의 노력 만큼이나 지금의 내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 속에서 순진 무구한 아랍인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뫼르쏘의 고뇌만큼이나 내 고뇌가 너무나 명확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돌아가야 한다!

「두목, 인생은 말예요. 강물처럼 늘 한 가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두목도 잘 아실 거예요. 문제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말이죠. 당장 배가 고프면 허기를 채울 만한 곳으로 가지요. 그리고 여자가 필요하면 여자를 찾아나서요. 돈이 필요하면 돈을 벌 수 있는 광산이나 공장으로 달려가면 되요. 인생에서 어떤 절대 기준점은 없는 법이에요. 아시겠죠? 어쩌면 두목 스스로도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실 살면서 가장 당황스러운 시간들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고 생각해봐도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모를 때가 있잖아요. 물론 내 안에 뿌리를 박고 있는 무수한 억압 기제들이 의식의 정상적인 소통 경로를 방해하는 탓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최소한의 소통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배신감 같은 것이 들기도 해요. 내 몸을 내가 믿을 수 없다면 그 다음은 무엇을 믿어야 살아야 하나 하고 말이지요.」

「그런 것 따위로 실망하지 말아요. 두목은 다름 아닌, 이 죠르바 안에 있는 존재하는 두목이에요. 그리고 나는 두목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죠르바이구요. 내가 두목을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 두목은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한 때 우리들은 텔레파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었나요?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을 보면 텔레파시가 꼭 실패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해가 짧아졌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어둠이 사이 사이에 잦아들기 시작했다. 밤이 다가올수록 이성의 활동은 차츰 둔화되고 파토스의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이다. 낮과 밤의 풍경의 차이는 이러한 인간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술집들은 이미 개시 준비로 부산거리고 있고 거리는 인파들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죠르바, 내려가서 술 한 잔 할까요?」

「마침 목구멍이 칼칼한데 아주 듣기 좋은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만 나는 거꾸로 무언가를 생각해내기 위해 술을 마시기도 해요. 물론 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현재보다 과거의 기억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하잖아요? 생애 최고의 격정에 휩싸였던 그 때의 느낌이나 감정들. 가끔씩은 그런 것들을 생각해냄으로써 왕성한 활기를 되찾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 날이면 특히 여자들이 더욱 간드러질 정도로 좋아했죠.」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이 아직까지 있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네요.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당신을 바라보면 늘 부러웠던 점이지만, 죠르바 당신에게는 생성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어요. 당신의 몸은 <생성>의 공간에 다름 아니죠. 무수한 의미와 가치들이 당신의 몸 안에서 만나 새롭게 탄생했어요.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이 비록 앙상하고 살가죽은 말라버린 나무 껍질처럼 변해버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눈을 속이기 위한 표면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언제부터인가 난 당신을 감각이 아닌, 직관으로 파악하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누려왔던 시간들이 영원했으면 좋겠네요, 두목. 갑자기 무슨 자연의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삶이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네요. 아, 이제는 끝인 거죠. 내가 만약 후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괴물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드는군요. 왜냐하면 사실상 이 죠르바의 시대도 이젠 거의 막이 내릴 때가 다가왔으니까요. 삶을 모질게 이어가고 있는 것은 단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만은 아닌 게죠. 물론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나 같은 인간을 데려가시겠지만 아직도 삶에 대한 기대가 끈질길 정도로 남아있어요. 극이 끝나면 관객들은 되돌아서나요?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내려가면 모두들 한숨을 쉬고 아쉬움을 느끼나요? 그 때 누군가 "앵콜"이라고 한 마디를 하면 별안간 분위기는 급속도로 반전이 되죠. 그래요. 난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앵콜"이라고 외쳐주었으면 좋겠어요. 난 언제든지 다시 무대 위로 뛰쳐나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거든요. 이게 내 요즘의 솔직한 심정이랍니다, 두목.」

구체적인 삶을 지탱하는 조건들. 물질적인 조건이건, 아니면 비물질적인 조건이건 간에 그것들은 경험 세계를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한 조건들이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는 아마도 식물 인간이거나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내는 염세주의자들일 것이다. 삶은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법이다. 죠르바의 삶은 역동적인 경험 세계를 통해 얻어진 가장 아름다운 산물이리라.

그렇다면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미 가상 현실이 리얼리티를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경험 세계는 양적으로 급격히 팽창하였지만 그것이 지닌 진실성의 문제는 오히려 희박하게 되었다. 진실성에 관한 문제는, 오늘 아침 신문에 나온 A양의 이니셜이 실제로 그녀를 가리키는 것이 맞는지를 따지는 것 같이 심심풀이 가십거리의 수준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웃고 즐기는 가운데 이성적 반성은 그 역할이 점차 축소되어갈 뿐이다. 본질에 앞서간다던 실존은 유쾌하게 질주해 나가는 가상 현실 앞에서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있다.

자신감이 없어졌다. 무언가 말을 꺼낸다는 것. 가상 현실 앞에 가로놓인 나의 언어는 그 어떠한 실존에의 단서도, 또는 눈꼽만치의 실재성도 보장할 수 없다. 나는 그다지 썩 유쾌한 편은 아니므로 이런 식의 언어적 자의식은 내게는 커다란 감옥처럼 느껴질 따름이다. 한 때 탈출하기 위한 길로서 시 쓰기를 선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적 자의식을 한층 강화시켜 탈출을 더욱 지난하게 만들었다.

난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있는 것일까.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는 불분명하다. 지도 상의 좌표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곳. 어쩌면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지구 반대편의 외딴 섬에 와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 곳으로 흘러오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처음에 있었던 곳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절대로 무슨 초월자가 아니다. 난 귀소 본능을 무기처럼 간직하고 있는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할 따름이다.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테이블 건너편의 죠르바는 머리를 앞으로 처박고 이미 깊은 잠 속으로 곯아떨어져 있다. 이제는 시간이 정말 남지 않았으므로 정말로 돌아가야 한다. 술 값을 계산하고는 비틀거리며 홀로 술집 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처음에 있었던 그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