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시대에 느림의 미학을 논하다
정보시대에 느림의 미학을 논하다
  • 문종효 기자
  • 승인 2010.05.29
  • 호수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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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역행하는 슬로라이프의 등장

정보사회. 오늘날 한국사회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다.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인터넷 및 IT기기 보급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 있어 정보는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되고 있다. 한국은 그만큼 정보사회의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갖고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사회에서 유난히 발달한 성과중심주의와 빠름중시풍조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경향이 유교적 입신양명주의와 합쳐져 사회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런데 최근 사회 곳곳에서 ‘느림’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다. 정보시대 한가운데서 불고 있는 슬로우 바람이 그것이다. 

산업사회의 그림자가 느린 문화 탄생시켜
90년대 후반부터 발생한 정보혁명은 전세계적으로 ‘후기 산업사회’, 즉 정보사회를 탄생시켰다. 정보가 우선시되는 사회, 빈부의 차이가 정보량의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의 탄생은 국가 간, 사회 간, 개인 간의 차이가 극도로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속도를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 도입된 신자유주의도 성과중심적인 사회문화의 출현을 앞당겼다. 정부기능을 축소시키고 기업의 영역을 확대함에 따라 모든 경제주체가 보다 효율적이고 능률적인 개인을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보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정보화 물결과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의 맨 앞줄에 서있는 우리나라에서 보다 잘 확인해볼 수 있다. 산업이 더욱 고도화되고 진전되면서 노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사회, 능력이 개인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손대현<사회대ㆍ관광학부> 교수는 이를 저서 「재미」를 통해 “일과 여유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깨지면서 문화강국인 우리역사의 조화가 깨졌다”고 분석했다.

‘느린 문화’는 빠름만을 추구하려는 정보사회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이를 추구하려는 문화가 존재하긴 했지만 정보사회의 병폐는 이를 더욱 자극시켰다. 김종덕<경남대ㆍ사회학과> 교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성과ㆍ효율 중심적인 사회문화의 병폐가 더욱 심각해졌다”며 “느림을 추구하는 문화는 이런 경향에 대한 반작용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퍼지고 있는 느린 문화
느린 문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유럽에서다.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병폐에 회의를 느낀 유럽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운시프트’ 운동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고소득이나 빠른 승진보다는 다소 적은 소득일지라도 여유있는 문화생활을 즐기려는 젊은 층을 의미하는 단어인 ‘다운시프트’는 성과를 중시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거부하며 유럽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런 경향은 최근 우리나라에도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대기업에 들어가 취직하거나 각종 자격시험에 합격해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려하는 기존의 가치관에 반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강민호<서울시립대ㆍ조경학과 09> 군은 “부와 명예를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며 “비록 대가는 적어도 내 스스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슬로푸드ㆍ슬로시티 운동도 느림을 추구하려는 대표적인 운동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는 그 지역에 진출한 패스트푸드점 ‘맥도널드’이다. 주문한지 1~2분이면 포장된 상품이 나오는 패스트푸드 시스템이 이탈리아의 식문화를 망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해졌고 이런 위기감이 슬로푸드 운동의 시초가 됐다. 오늘날 슬로푸드 운동은 웰빙 문화와 결합돼 그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슬로시티는 슬로푸드 운동과 더불어 생겨난 운동으로 느리게 살기와 느리게 먹기를 포괄하고 있다. 이는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전통 방식을 지향하려는 문화운동이다. 한국도 최근 신안, 완도, 장충, 담양, 하동 등 다섯 지역이 슬로시티에 선정돼 새로운 농촌 모델을 이뤄가고 있다. 신안의 천연갯벌, 하동의 자연녹차농원, 담양의 돌담길 등 그 지역의 오랜 문화를 계속해서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다음달 25일부터 29일까지 ‘국제슬로시티시장총회’가 한국에서 열려 조만간 6번째 슬로시티를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슬로 라이프 바람은 패션계에서도 불고 있다. 슬로패션은 일주일 단위로 상품을 교체해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패스트패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이 패션양식은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좋은 품질의 옷을 오래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이 때문에 패스트패션 업체들도 앞다퉈 슬로패션 브랜드를 내놓고 있다. 최근 슬로패션 브랜드 ‘COS’를 론칭해 큰 성공을 이룬 다국적 패스트패션 업체 ‘H&M'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해진<대외홍보부ㆍ마케팅담당> 직원은 “양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대에 제공한다는 점은 기존의 패스트패션과 다를 바가 없다”며 “하지만 유행을 타지 않기 때문에 보다 오랫동안 입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슬로웨딩이란 기조 아래 느린 문화를 전파해나가고 있는 결혼정보업체 ‘디노블’, 중국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느린 우체부’ 운동 등 곳곳에서 효율중심적인 시대에 반항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미약… 점차 주목받을 듯
그러나 이런 슬로 문화를 사회현상이라고 보기엔 여전히 제약요인이 많다. 우선, 대규모의 사회적 움직임이 없다. 국내 슬로 운동은 세계적으로 이뤄지는 슬로 운동에 비교했을 때 아직 그 영향력이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슬로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대중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슬로 문화의 대중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있다.

슬로 문화를 대중화할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점도 문제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 김 교수도 “개인주의적 취향을 가진 젊은이들이 현재의 직장문화에 회의를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문제삼을만한 사회적 여건은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느림을 추구하려는 경향은 점차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속도를 강조하는 정보시대의 발전이 거듭되면 될수록 이에 대한 반작용도 커지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앞으로 정보시대의 발전은 그 정도나 파장이 오늘날보다 더욱 커질 것”이라며 “이 같은 방식에 회의적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슬로 라이프는 점차 외연을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일러스트 주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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