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속에 슬피 우는 ‘귀촉도’를 찾아서
‘국화’속에 슬피 우는 ‘귀촉도’를 찾아서
  • 이다영 기자
  • 승인 2009.11.15
  • 호수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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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문학성과에 재평가 움직임 필요

미당의 굴곡진 일생
미당 서정주는 지난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7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으로 등단한 뒤 김광균, 김동인 등과 동인지를 발행했다. 1941년엔 「자화상」, 「문둥이」 등 시 24편을 묶어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했다. 이듬해부터는 ‘다츠시로 시즈오’로 창씨개명 후 「매일신보」를 통해 친일 작품을 발표했고 친일 어용 문학지 편집을 맡으면서 평론 1편, 시 4편, 단편소설 1편, 수필 3편, 르포 1편과 10편의 친일시를 발표했다.

해방 후 시집 「귀촉도」, 「서정주 시선」을 통해 우리 민족정서와 자기 성찰적 태도를 잘 드러냈고 불교사상이 깊게 깃든 시집 「신라초」로는 ‘5ㆍ16 문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향토적인 샤머니즘을 구현한 「질마재 신화」, 「팔할이 바람」 등을 펴냈다. 「동아일보」 사회부장과 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과 조선대ㆍ동국대의 교수를 지내고 각종 예술인협회의 대표직을 맡아 여러 문인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1981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위한 지원 연설을 했으며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 그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문인협회에서는 “4.13 호언조치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 민주화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따라서 80년대 후반부터 그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내리막길을 탔다.

87년 국정교과서 개편작업 중 김우종<한국대학신문> 주필의 “국어 교육은 민족교육이므로 민족을 배반한 친일문인의 글은 삭제돼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90년대 초반 「국화 옆에서」가 약 40년 만에 국정 교과서에서 자취를 감췄으며 곳곳에서 그와 그 친일행각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이렇게 시작된 문화적 고립 속에 칩거에 들어간 그는 지난 2000년 12월 24일 숨을 거뒀다.

미당에 대한 기존의 시선들
지난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하면서 ‘서정주’는 검색어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미당은 칠십 평생의 창작활동에도 불구하고 일제 말 친일행각과 신군부 지지로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2001년 그의 제자였던 시인 고은은 ‘미당 담론’을 통해 미당의 삶과 문학을 비판했고 이는 문단 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했다.

한편 며칠 전 동국대는 그를 인터넷 ‘누리집’과 일간지 광고에 모델로 실었다가 누리꾼들의 항의와 질책이 이어지자 이를 그만뒀다. 당시 담당자 A는 광고 중단에 대해 “들끓는 여론과 댓글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미당의 문학과 삶을 기리기 위한 사업들도 마찬가지였다. 미당의 고향에 위치한 미당시문학관에는 일부 단체의 요구로 현재까지 친일시가 함께 전시되고 있으며 문학관 자체도 지속적인 폐쇄운동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2001년엔 서울시에서 그의 고택을 사들이려 하다가 ‘친일파의 집을 보존해선 안 된다’는 심한 반대에 부딪혀 불발되기도 했다. 결국 그의 고택은 10년 여간 폐가로 방치된 결과 올해 들어 보존이 확정됐다.

그의 ‘문학’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
한편 미당의 작품은 아직까지 다수의 현대문학 연구 대상이 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해외에 소개된 한국문학 자료 중 최다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갖고 있다. 그의 생전엔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추천되기도 했다. 최근 사회 각계에서는 미당의 이런 작품성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매년 열리는 미당문학제와 그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따와 11월마다 열리는 고창 국화축제, 질마재문화축제 등은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끌고 보다 유연한 평가의 공간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시인 신경림은 올해 미당문학제에서 특강을 가지며 “미당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말(사투리)을 가장 잘 구사한 시인”이라며 “친일은 그가 남긴 한 부분에 불과한데 그 때문에 뛰어난 시들까지 폄하한다면 우리의 문학이 가난해진다”고 말했다.

얼마 전 발기인 모임을 가진 미당기념사업회의 총무 윤재웅<동국대ㆍ국어교육과> 교수는 “미당이 남긴 1천 여 편의 작품에는 그의 소년시절 치기어린 시부터 죽음을 앞둔 달관까지 인생의 파노라마가 녹아있다”며 “젊은 시절의 친일시 몇 편만을 침소봉대해 ‘나쁜시인’으로 칭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말했다.

또 “‘미당은 친일파’라는 일방적 정보만이 주입되는 현실 속에서 그의 흠만이 지속적으로 부각되는 분위기가 형성돼 왔다”며 “미당의 잘 된 작품 또한 나란히 보여주고 과오는 과오대로 문학적 공적은 공적대로 평가받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미당이 30년 동안 집필활동을 하던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자택은 현재 원형 복원 및 보수공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에 김희석<관악구청ㆍ문화체육과> 직원은 “서울시에서 복원사업을 위해 예산을 배정해 내달까지 착공할 예정”이라며 “이는 미당의 친일행적이 아닌 문학정신을 기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서정주 시인의 고택을 복원해 관악의 문화명소로 지정하려고 한다”며 “양옥집을 그대로 복원하고 전시실, 북카페와 세미나실을 만들어 일반 주민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가려 한다”고 전했다.

그의 문학적 성과 평가는 각자의 몫
최범찬<인문대ㆍ국어국문학과 03> 군은 “개인적으로 시대에 휩쓸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노하기보단 안쓰럽게 생각하는데 시인이라고 불리는, 서정주 ‘개인’이 아프게 생각되기도 한다”며 “이데올로기와 예술의 연관성을 얼마만큼 생각해야 할지는 개개인의 자유지만 과거에 대한 판단과 단죄는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해 친일청산에 대한 과업은 찬성”이라고 말했다.

또 “작가의 삶과 문학의 연관성을 무시할 수 없고 철학이나 신념이 작품에 투영되기도 하니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긴 좀 어렵다”며 “하지만 시대와 작가를 떠난 그의 ‘시’는 참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는 그에 대해 복잡하고도 다양한 시각을 갖고 있다.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들은 좀처럼 조정될 기미가 안 보이지만 우리 사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전하기 어려웠던 흑백논리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다. 찬바람에 나부끼는 목도리를 다듬으며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던 그의 시구를 떠올려본다. 초겨울 피는 국화처럼 자라나는 그의 문학적 성과에 대한 재평가 속에서 미당에 대한 맹목적 추앙이 아닌, 문학적 성과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다시금 우리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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