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는 삶, 그 자체에서 슬픔과 감동을 느낀다”
“음악가는 삶, 그 자체에서 슬픔과 감동을 느낀다”
  • 최서현 기자
  • 승인 2009.05.17
  • 호수 12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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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간 한양을 지킨 성악가 신영조<음대·성악과> 교수

예술가와 인터뷰하는 것은 힘들다. 그저 ‘아름답다’고만 봐왔던 그들 뒤에는 그 이상의 열정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그 열정 앞에서 나 자신이 너무나 작아지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정년퇴임을 하고 어느덧 66세의 나이를 갖고 있는 그이지만 20살의 청년과는 다른, 신영조만의 ‘청춘’을 품고 있었다.

고난이 큰 힘이 되다
신 교수가 밟아온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이야기를 하자면 길고도 험난하다. 야구선수로 활동했던 고등학교 시절 팔을 다쳐 입원을 하게 된 그는 우연히 클래식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게 된다. 음악 분야에는 문외한이었음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끌림에 의해 음악에 대한 뜻을 품게 됐다.
“사실 작곡가를 하고 싶었지만 피아노를 배우기는 조금 늦은 나이였기에 노래에 대한 새로운 꿈을 품었어요. 하지만 내가 꿈꾼다고 다 되나요. 시골사람이었던 부모님의 반대가 대단했지요. 의사도 교사도 아니고, 게다가 장남인 자식이 갑자기 음악을 하겠다니. 그래도 나는 반대를 무릅쓰고 계속 나아갔어요”
따로 배울 돈도 환경도 여의치 않았던 그는 혼자 교회를 다니며 꾸준히 연습해 우리학교 성악과에 입학하게 된다. 음악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생각했지만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그는 돌연히 군에 입대한다. 갑자기 소리가 ‘안 났기 때문’이다.
“사실 홀로 고뇌하는 시간도 많았어요. 그만 두고 싶은 적도 많았지요. 2학년이 되고 나니 여러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기본음이 나지 않았으니. 제대로 망가져 보자는 생각으로 군에 입대했어요” 그는 성악가로서는 금기인 담배도 피기 시작했고 제대 후에는 관심 있던 생물학이나 법학을 공부해 학자가 되고자 마음먹었다. 음악가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다.

음악이 다시, 운명적으로 다가오다
“그건 기적에 가까웠어요”
제대 6개월을 앞두고 보초를 서고 있던 그는 문득 ‘노래’를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불렀고 전에는 잘 나지 않던 고음까지 부를 수 있었다. 그 순간 잊고 있던 자신의 꿈을 되새겼고 다시 한번 다짐을 하게 된다. 음악을 놓지 않겠다고.
우연히 신 교수의 노래를 들은 선임은 그에게 음악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6개월 동안 그가 마음껏 노래할 수 있도록 레슨을 받게 한 것. 그리고 그는 일요일마다 노래공부를 하게 된다. 음악을 포기하고 간 그곳에서 기적처럼 음악에 대한 희망을 찾게 된 것이다.
매일 노래를 하다 보니 성대는 종이만큼 얇아지게 됐다. 성대의 혹이 났다는 것을 발견하고, 2년간 벙어리처럼 이론 공부만 하면서 꾸준히 버텨냈다. “사실 참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앞길이 보이는 거 같다 싶다가도 어두워지는 것이 예술세계이고, 계속해서 고난이 찾아왔으니까. 호사다마일수록 겁이 났다니까, 되려(웃음)” 수많은 고난 속에서 그는 고난을 큰 힘으로 삼았다. 이제는 죽으나 사나 자신이 할 일은 음악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75년 본교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유학을 하던 도중 한국에서 오페라 「파우스트」에 출연해 달라는 제의를 받게 된다. 그가 유학을 가 있던 5년간, 우리나라의 음악은 상상 이상으로 발전해 있었다고 신 교수는 말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한양의 음악가가 되다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33살 젊은 나이에 본교 성악과 교수가 됐다. “젊은 나이에 교수라니, 출세라면 출세였지만 성악가로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고, 또 봉급도 적었어요(웃음). 그렇지만 역시 한국에서 노래를 부르고,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곳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실제로 7~80년대는 군사독재 시절로 비탄조 가요가 흥행하던 시기라, 신 교수에게는 가곡의 밤과 같은 행사 등 여러 섭외가 들어왔다. 한국에 머무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세계무대에 대한 꿈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 수많은 독창회와 연주회 그리고 오페라 공연으로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도 서게 됐다. 결국 세계무대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성악가로서의 활동을 하면서도 교육자로서도 최선을 다했다. 그가 가르쳤던 제자 수만 해도 이제까지 400명이 넘는다. 교육과정을 정비하고 연습시간을 늘림으로써 지금의 ‘한양음대’를 만들어냈다. 한양의 역사와 함께 했던 그에게, 다시 한번 위기가 다가왔다.
“당시 저는 연주가 끝나면 늘 술을 마시곤 했는데 그 날은 술에 많이 취한 것이 아니었는  데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죠. 아내까지 이상한 낌새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뇌경색이라더군요”
머릿속 실핏줄이 막히는 뇌경색으로 신 교수에게는 발음이 이상해지는 구음장애증상이 찾아왔다. 성악가에게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고난을 딛고 ‘청춘’을 만나다
그는 또 한번 닥친 고난에 마음의 병까지 앓을 수 밖에 없었다. 노래도 연주도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은 식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고 나를 의지해 음악의 길을 걷는 제자들이 있으니 레슨은 그만두지 않았지요” 그의 식지 않는 열정  때문인지 그는 인생에서 ‘음악’을 되찾았다. 지난 2005년, 기력을 되찾고 재기 독창회를 열었다.
“병을 얻고 몇 년이 지나니, 이것들이 젊은 시절부터 나 자신을 혹사시켜 훈련하던 결과인 거 같기도 했고. 또 이게 늙어가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의 병도 낫더군요. 아직 완쾌는 아니지만 마음가짐은 음악을 갈구하던 청년시절로 돌아간 듯 싶어요”
그는 다시 태어나도 음악을 하고 싶단다. 지금의 생애에서 음악이 최우선이었고, 운명이라고 느꼈기 때문. 자신이 이렇기에 제자들도 진정 음악을 평생 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행복을 느껴야 한다고 신 교수는 말한다.

“제자들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고 싶습니다”
정년퇴임 후에도 명예교수로서 그는 자주 학교를 찾는다. 자신은 퇴임을 했지만 가르치던 학생들은 끝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정신적 의무 때문이다. 졸업생이외에도 아직 5명의 학생이 신 교수 아래서 수학 중이다.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제자 중 한 명은 테너 김우경<성악과 76> 동문이다. 작년 8월 신 교수와 김 동문이 한 무대에서 공연을 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김우경은 원체 소리도 좋았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전 세계에서도 사랑 받을 수 있는 테너가 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한양대를 다니던 60년대에만 해도 전국에 음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게 있었고 환경도 열악했지요”
신 교수는 우리학교 성악과 63학번 동문이다. 입학 당시의 감동을 잊을 수 없고 지금도 학교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교심을 품고 있지만 당시 상황이 열악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지금처럼만 교육이 잘 이뤄진다면 수많은 제자 그리고 후배들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겠지요”

“음악가의 실력은 미화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외한의 청중이라도,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감동이 있다. 음악이라는 것에 그리고 음악을 느끼는 것에는 ‘솔직함’이 전부다. 청중이 음악 속에서 슬픔과 감동 모든 것을 느끼듯,
음악가는 삶 그 자체에서 슬픔과 감동을 느낀다. 그렇게 음악가란 스스로 행복하기도 해야 하고 청중에게 있어서 신뢰를 받기 위해 스스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뜻.
“앞으로 사람들에게 음악에 있어서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동료 사이에서도 믿을 수 있고 정직했던 사람으로 기억에 남고 싶습니다. 음악이 가장 정직한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평생 음악을 운명으로 느끼고 몇 번의 기적을 바라봤던 음악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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