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란 미명하에 행해지는 상견례 문화
전통이란 미명하에 행해지는 상견례 문화
  • 이채린 기자
  • 승인 2009.03.15
  • 호수 12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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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강압적 분위기 아래 신입생 군기 잡기위한 얼차려

“안녕하십니까…”
있는 힘껏 외치자마자 “다시! 더 크게!” 하는 외침들이 쏟아진다. 결국 같은 말을 몇 번이고 한 뒤에야 자리에 돌아가 앉을 수 있었다. 그리 작지 않은 공간 안엔 긴장감이 가득하다. 줄 지어 놓인 의자에는 신입생들이 경직된 자세로 앉아있다.

하나같이 허리를 펴고 팔을 곧게 뻗은 자세다. 걸음을 걸을 때도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걸음을 맞추는 완벽한 ‘군대식 걸음’을 요한다. 선배들은 신입생들이 자신의 이름과 학번, 학과, 출신 고등학교 등을 계속 복창하도록 강요한다.

선배들은 신입생 사이를 거닐며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신입생들을 잡아내 지적한다.
오랜 시간 긴장 속에서 딱딱한 자세로 앉아있어야 하지만 몸을 움직이거나 눈동자를 돌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한 여학생의 목소리가 충분히 크지 않자 여자 선배의 비웃음이 날아온다.
“야 너 안 예뻐. 그러니까 예쁜 척 하지 마”
그 뒤엔 선배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긴장감에 말이 꼬이거나 목소리가 갈라질 때도 어김없이 야유와 조소가 쏟아진다. 이런 ‘폭력’은 2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위의 광경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학교 ○○과 ‘전통’인 상견례의 예행연습 모습이다. 상견례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한데 모인 자리에서 1학년이 자신을 소개하고 장기자랑을 선보이는 자리다.
겉보기엔 친목을 위한 관례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상견례 예행연습은 시종일관 고압적인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선배들의 인격모독과 신입생들을 깔아뭉개 웃음거리로 삼는 일이 만연한 가운데서 ‘친목’이란 말은 허울과 포장에 불과하다.

반드시 강도 높은 얼차려를 가하거나 신체적 폭행이 이뤄져야만 폭행이 아니다. 몇 시간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고개조차 돌릴 수 없게 하는 것, 외모를 가지고 웃음거리로 삼는 등 언어폭력으로 인격을 모독하는 것, 군대에서 신병의 관등성명을 떠올리게 하는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몇 차례씩 FM(자기소개)을 강요하는 것 모두가 폭력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작 그 주체들은 이를 인지하고 있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감행하고 있다. 상견례 예행연습을 진행하던 학생은 “상견례는 오래 전부터 이어지던 우리 학과의 전통으로 작년에는 교수님이 계신 앞에서 진행했다”며 상견례에 문제가 없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상견례 모습을 타대생에게 비공개로 하는 것은 ‘남에게 알려줄 수 없는 음식을 만드는 비법’으로 비유했다.

이 전통이 악습이라는 것은 “너네도 내년에 우리랑 똑같이 하면 돼”라는 그들의 말로 알 수 있다. 이 말이 이제껏 상견례를 유지시켜 온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선배들로부터 전수돼 내려온 요리 비법을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똑같이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있는 셈이다.

해당 대학 학장 A교수는 “상견례 행사는 20년 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타대와 달리 학년 전체가 듣는 수업이 많아 학생회 측에선 상견례가 선후배 간에 낯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는 자리라고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새내기 배움터(OT) 때 치러져야 한다는 게 학교 측 입장임을 밝혔다.

하지만 이 대학의 상견례가 문제로 떠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 강압적인 상견례 문제가 교수들 귀에도 들어가게 되면서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A교수는 처음에는 상견례 문제를 이번에 알게 됐다고 부인했지만 곧 “그 당시 학생회를 소집해 상견례를 없앨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상견례 일정이 계획됐고 예행연습이 이뤄졌다.

본래 13일로 예정됐던 상견례에 대해 A교수는 “상견례는 못한다”고 일축했다. “학생회장을 통해 다시 한 번 상견례 폐지의 의견을 전달했다”며 거듭 상견례 폐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작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 만큼 좀 더 강경한 대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악습이 해당 학과 한 곳에만 존재하는 건 아닐 것이다.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신입생들에게 가해지는 일련의 폭력들은 사라져야 한다.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라고 인식하는 게 문제다. 학생과 학교 모두 폭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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