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엔 자유가 없다
역사 교과서엔 자유가 없다
  • 이시담 기자
  • 승인 2009.02.28
  • 호수 12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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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검정교과서 집필진 동의 없이 편집해

교육과학기술부는 좌편향 서술을 이유로 작년 10월 30일 5종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수정을 권고했다. 현재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제외한 4개의 교과서는 교육과학기술부와 협의해 수정을 마친 상태다.
그러나 금성출판사 근현대사교과서는 수정을 거부한 집필진 대신 출판사가 임의로 교과서를 수정해 논란이 되고 있다. 금성출판사 집필진은 정부의 교과서 수정지시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에서는 수정금지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천재교육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집필에 참가했던 서울대 박태균<국제대학원ㆍ국제학과> 교수는 이 상황에 대해 “금성교과서 집필진은 학계에서 좌파나 진보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아니다”라며 당혹스러운 심정을 드러냈다.
뉴라이트 단체에 소속된 교과서포럼은 금성교과서를 좌편향 교과서로 지목하며 수정을 요구했고 작년 3월에는 대안교과서를 냈다. 이 교과서는 사실관계의 확인이 잘못돼있고, 편파적 서술, 식민사관적 서술을 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 문제를 보여줬다. 

한국근현대사 과목은 7차 교육과정 때부터 생겨났다. 기존 6차 교육과정까지 근현대사는 독립된 과목이 아니었고 국사 교과에 편성돼있었다. 국사교과의 저작권은 정부에게 있어 정권 교체마다 근현대사의 서술 내용이 바뀌는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검인정제도를 택하고 있다. 검인정제도는 출판사에서 교과서를 만들면 정부에서 내용의 타당성과 교과서로써의 활용여부를 판단해 교과서 사용을 허가해주는 제도다.
검인정 교과서가 쓰여지고 검정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검정기준을 만족해야한다. 박 교수는 “교과서의 집필기준은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는 편”이라며 “교과서에서 다뤄야 할 내용이 단원과 세부항목까지 제시돼 있다”고 말했다. 

이 기본 사항을 만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검정을 통과할 수 없다. 집필상의 유의점에서는 특정 세력에 편향된 시각을 배제하도록 구체적인 항목이 제시돼 있다. 이는 처음부터 저자가 자의적으로 배치하고 저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또한 교과서는 특정인의 시각이 아닌 집필진 전체의 논의를 통해 쓰여지기 때문에 개인적이거나 자의적인 해석이 들어가기는 더욱 어렵다. 교과서는 2단계의 검정이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서는 10명의 검정위원이 네단계에 걸쳐 교과서를 검정한다.
그래서 검인정을 받은 교과서들은 서술의 어조와 강조하는 부분이 조금씩 다를 뿐, 동일한 기본틀을 갖고 있다.
실제로 교과부가 금성교과서 외의 4개의 교과서에 수정을 권고한 부분은  일부 어조와 표현이다. 이 부분을 보면 교과서의 좌편향이 문제삼을 정도로 심한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검정을 한 교과서에 대해 왜곡 의문을 표하고 수정을 권고한 정부의 행동은 이전 정부의 결정을 부정한 꼴이다. 학계에서는 정부가 권력을 이용해 자기 역사관에 맞게 표현 하나하나까지 간섭할 수 있는 선례를 남긴 것은 아닌지 염려하고 있다.

박찬승<인문대ㆍ사학과> 교수는 “일부에서는 괜한 금성교과서 때리기라며 이럴 바에야 차라리 국정교과서로 돌아가는게 낫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한때 역사교과서의 편향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지만 한국처럼 국가가 개입해 정치논리로 해석한 예는 없다.

국가에서 검정을 받아야만 역사 교과서로 사용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자민당이 근 60년간 정권을 잡고 있고 후소샤에서 낸 교과서 외의 다른 교과서들은 내용과 방식에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어 교과서 편향이 크게 문제된 일이 없었다.
미국이나 영국은 국가가 역사 교과서를 검정하지 않는 자유발행제를 택하고 있다. 각 학교에서는 운영위원과 교사들이 참여해 교과서를 채택한다. 교과서를 시장의 자율경쟁에 맡긴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역사의식이 성숙했으며, 까다로운 출간 시스템 덕분에 학술적 가치가 부족한 교과서는 출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도 자유발행제가 시행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교과서의 일정 수준을 확보하고 교과서 출판이 상업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을 막기 위해 검인정 제도가 최선이라는 의견이다.

박찬승<인문대ㆍ사학과> 교수는 현 상황에 대해 “검인정 제도가 안정돼야 자유발행제도 가능해진다”며 “정부에서 문구 하나하나 간섭하는 상황에서 자유발행제는 요원하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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