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ㆍ북 사이의 벽을 허물고 싶습니다”
“남ㆍ북 사이의 벽을 허물고 싶습니다”
  • 최정호 기자
  • 승인 2008.09.28
  • 호수 12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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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로싱」김철영<예술학부ㆍ연극영화학과 02> 조감독을 만나다


북한사람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 깡마른 얼굴에 왜소한 체구. 편견을 버려야한다는 기자도 사람인지라 알게 모르게 그렇게 상상해 버렸다. 게다가 바쁘다면 서도 친절하게 시간을 내주는 모습에 ‘이 사람 만만하겠는데?’라는 ‘건방진’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인터뷰 장소에 나가니 기다리는 사람은 곰 같이 우람한 체구에 건강하게 타오른 얼굴, 날카로운 눈빛. 장팔사모만 안 들었지 순 장비다. 혹시나 해서 “저기 김철영 감독님 되시는지…”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 “예 맞습니다” 어이쿠, 이거 만만치 않겠다.

「크로싱」은 92만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쳐, 흥행에 대성공을 거뒀다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제 16회 춘사대상영화제에서 특별 아역상을 포함해 8개 작품을 휩쓸었고 하와이국제영화제에서 초청작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작품성에 있어서만큼은 ‘새터민의 현실을 표현한 역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다. 세간에서는 ‘대중영화의 탈을 쓴 예술영화’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러나 막상 김 조감독은 「크로싱」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크로싱」, 새터민을 이야기하다
“이전에 연출로 참여했던 「국경의 남쪽」에서 「크로싱」까지 이미지가 굳혀지는 느낌이 싫어서 참여하기 꺼렸었어요. 좀 더 넓은 경험을 하고 싶었던 데다 북한과 관련한 경험을 직접적으로보다는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를 찍고 싶었죠. 「국경의 남쪽」에서 느꼈던 관객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했던 것도 있구요”
학교 선배의 소개로 어쩔 수 없이 김태균 감독과의 인터뷰를 나갔다가 ‘본인이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관객들은 더욱 등을 돌린다’는 말에 참여를 결심했다. 그렇지만 「크로싱」에는 그가 걸어왔던 길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줄거리에서부터 스토리, 촬영 장소까지 「크로싱」은 그의 과거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 때 친구 집에 점심을 얻어먹으러 갔는데 희멀건 죽만 끓이고 있더라고요. 저는 그게 돼지 주려고 끓이는 죽인 줄 알았죠. 친구에게 왜 밥 없냐고 타박주다 지쳐 집에 돌아왔죠. 그날 어머니한테 죽을 만큼 맞았어요. 친구는 먹을 게 없어 옥수수를 끓여먹고 있는데 거길 밥을 얻어먹으러 간데다 그런 속없는 말까지 해버렸던 거죠”

그는 일을 안 하고 굶기를 선택하는 것이 남한의 모습이라면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게 없어 굶게 되는 것이 북한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96년도 즈음에는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그가 살고 있던 군 병원 기록만으로도 하루 15명에 달했다. 그나마도 영양실조는 재난으로 평가되기에 설사병으로 죽었다고 발표됐다.
“죽은 사람들을 처음에는 나무관으로 묻다가 이불장에서 가마니로 나중엔 그냥 묻게 되요. 그나마 성인들이 굶어 죽은 것은 체구가 있다 보니 괜찮은데 아이들이 굶어죽은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어요”
말을 하는 그의 눈빛엔 슬픔이 가득해보였다. 말 한 마디마디에는 길거리에 사람이 죽어있어도 ‘치워야 되기’ 때문에 모른 척 해야 했다는 당시의 경험이 묻어나고 있었다. 96년도에 27만이던 군 인구가 2000년도에는 21만으로 줄었다. 정말 극심한 흉년이었다.

“사람이 한 사흘 정도 굶으면 아무 일도 하기 싫어지고 그냥 누워있게 돼요. 최근에는 그렇게 굶었던 독기를 살리고 싶어 단식원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역시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것하고 먹을 것이 있는데 굶어보는 거하고는 많이 다르더군요. 얼마 못 버티고 도망나왔죠”

한양대와의 특별한 인연
“한양대에 와서는 매 학기마다 영화를 찍던 것이 생각나네요. 매일같이 밤새가며 하던 일이 어찌나 힘들던지. 138계단을 땀 뻘뻘 흘리며 올라가던 기억도 나구요. 하하, 왠지 힘든 것만 추억으로 남아있네요? 즐거운 일도 정말 많았는데”

김 조감독이 우리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98년도에 알게 됐던 한총련 때문이었다. 당시 한총련 활동으로 유명했던 한양대가 외치던 ‘사람과 정의’가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막상 첫날에 발견한 반미 플랜카드와 흉흉한 분위기에서 ‘어라,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도 했다.

“한양대에 와서 처음으로 MT를 갔는데, 남한은 북한이랑 달리 술을 밤새도록 마시는 문화라 정말 힘들더라구요. 북한의 술 문화는 단시간에 많이 먹고 뻗어버리는 것이라. 그래도 거기 있을 땐 술 잘 마신다고 자부했었는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여자보다 못해요. 차분하고 참한 얼굴들에 그 많은 술이 들어가다니…”
추억에 빠진 얼굴이 왠지 모르게 창백해 보이는 건 착각만은 아닐 것 같다. 북한의 ‘단시간에 끝장’내는 술 문화는 부족한 술안주 때문일 거라는 것이 그의 생각.

“북한 소주는 최소 25도가 기본이에요. 다만 안주꺼리가 없어서 최고 좋은 안주가 고기에 두부를 볶아서 나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안주만 먹고 술 안 먹는 사람은 술자리에 절대 들이지 않죠”
남한과 북한의 대학 문화에서 가장 다른 점이라면 ‘연애’란다. 북한에서 자유연애란 ‘금기’다. 덕분에 남한에 와서는 매일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고.

남북을 잇는 교량 ‘새터민’
이제는 북한말마저 잊어가는 김 조감독이지만 여전히 ‘새터민’이라는 단어는 그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고 있다.

“뭐 처음부터 ‘나 새터민이오’라고 밝히는 것은 아니죠. 새터민이라는 사실을 꺼려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처럼 편한 관계가 되면 자연스럽게 얘기해요. 주변 사람들도 그냥 거리낌 없이 받아 들이구요. 다만 밝히기 전에는 어떤 얘기를 해도 그냥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새터민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우와, 어떻게 그런 것도 알아?’하는 태도로 바뀌더군요. 조금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6월 말까지 입국한 새터민은 1만3천996명이다. 통일부는 "올해 상반기 입국한 새터민은 1천748명으로 작년(1천230명)보다 42.1% 증가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새터민이 늘어나는 데 정치적 목적은 10%정도밖엔 안 될 거라고 했다. 결국은 가난인 것이다.

“전 지금의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새터민이 늘어나 1만4천여 명에 달하는 지금에도 관심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통일은 하기 싫든 하고 싶든 상관없이 일어나게 될 ‘당위적인’ 미래의 일이에요. 그 순간을 위해 새터민은 남한과 북한을 서로 이해시키는 교량 역할을 할 거에요”

그는 남북 두 사회의 모습을 필름에 담아내고 싶다. 양 사회 모두 감동할 수 있는 영화, 더 이상 슬프지만은 않을 미래를 찍고 싶다.
“저의 꿈은 영화감독입니다. 남북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찍는 그런 감독이 되는 게 지금 제가 바라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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