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살기 좋은 사회 만들고 싶다”
“모두가 살기 좋은 사회 만들고 싶다”
  • 이다영 기자
  • 승인 2008.09.21
  • 호수 12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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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서울특별시 토목상’ 대상 수상한 천병식<공대·토목공학과> 교수

▲ 천병식 교수는… 1948년 출생했다.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부터 현재까지 한양대 공과대학 토목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건설산업연구소장과 한양대 건설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지반공학회장, 정보통신부 조달사무소 설계 자문위원, 건설교통부 중앙건설 기술심의위원회 위원, 환경부 중앙환경보전 자문위원, 국방부 특별건설기술 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대한토목학회 논문상'과 '정부포상 건설교통부 장관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엔 '서울특별시 토목상'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끊임없이 터지는 스포트라이트. 그 속에 단연 빛나는 그가 있었다. 지난 1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5회 서울특별시 토목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차지한 천병식<공대ㆍ토목공학과> 교수를 만났다. 여러 수상자 가운데서도 가장 큰 영광을 안은 천 교수는 기자를 보자 “어서들 와요, 오느라 고생 많았지”라며 따뜻하게 반긴다. 쌍꺼풀 짙은 초승달 모양의 눈, 입가의 팔자 주름이 영락없이 ‘웃는 상’이다. 깊은 눈동자는 교수가 아니었다면 시를 썼을 법하다.

서울특별시 토목상 시상은 서울시의 안전하고 수준 높은 도시기반시설과 토목기술 발전에 기여한 시민ㆍ단체를 대상으로 한다. 지난 2004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5회를 맞았다.
“나도 서울 시민의 한 사람인데 연구한 분야가 서울 발전에 이바지했단 점에서 이보다 큰 기쁨은 없어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사랑하는 가족과 후학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이번 수상은 연구 성과를 재평가하고 다음 과제를 그려보는 기회가 됐어요"

나와 서울을 돌아본 계기
천 교수는 서울에서 40여 년을 지냈고 토목과의 인연 역시 40년이다. 이렇듯 천 교수에게 서울와 토목은 인생의 전부다. 그가 항상 서울시의 토목기술 발전에 많은 관심과 애착을 쏟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유학 시절 선진 외국의 발전된 기술을 직접 경험하고 우리나라에도 인프라 확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낀 그는 귀국 후 수도권의 도로와 지하철 건설을 위해 힘썼다. 교수라는 공인에서 나아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졌다.

“서울 시민으로서 발전된 시의 모습을 희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죠. 능력을 조금이나마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어요. 기회가 올 때마다 서울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죠”
또 서울시에서는 1970년대 말 건설 중이었던 지하철 2호선을 시작으로 30년간 천 교수에게 지하철 건설 자문을 해왔다.

이후 천 교수는 지하철 건축공사를 위한 해외기술의 국산화와 개발 보급에 앞장서는 등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제외한 전 호선의 개통에 관여했다. 서울시 건설기술심의위원, 지하철 기술자문위원, 건축심의위원, 각 구청 건축심의 위원 및 자문위원, 재건축 안전진단 평가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서울시 지하철 건설의 토목기술 향상 및 보급에 힘썼다. 서울의 각종 대형 건설과 도시철도 개통 등 중요사안에도 꾸준히 조력해 서울시 발전을 옆에서 지켜왔다.

“지금까지 이런 역할들은 모두 자연스레 이뤄졌고 당연히 해야 할 소명으로 생각해 즐겁게 일할 수 있었어요. 또 작은 노력으로 가족과 제자들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단 점은 늘 의지를 북돋우는 활력소가 됐죠”
천 교수는 우리 학교 출신이다. 토목공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정 후 사랑의 실천과 실용학풍이란 교훈이 인상 깊어 한양공대에 입학했다. 재학 중 ROTC로 입대해 졸업 후 육군 공병소위로 임관했다. 김해 공병학교를 거쳐 전방사단 직할 공병대대에서 군사도로 개설 공사현장에 투입됐고 이듬해부턴 공병단에서 공사 장교로 근무했다.

“한양대는 가장 큰 주춧돌”
“군 생활은 실무 경험을 쌓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전역 후엔 우리 대학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고 네덜란드 왕립 대학에서 유학했죠. 커리큘럼에 따라 세계적인 토목설계 회사 및 연구소, 공사 현장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국제적 감각을 기를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정말 값진 기간이었습니다.
귀국 후엔 역시 우리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땄어요. 그리고 잠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영국과 미국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죠”

이후 그는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우리 대학을 고집해 교육과 연구 활동에 주력했다. 현재는 공과 대학 학장으로 2년의 임기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와 개인 연구와 학생 지도에 전념 중이다. 또한 공과대학의 현신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교직에 있는 30년 동안 후학들을 올바르게 지도해 사회에서 인정받고 국가에 봉사하는 인재를 기르는 게 목표였어요. 이렇게 훌륭한 제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겁니다. 또 이젠 국내 대학끼리의 경쟁이나 대학 브랜드에 따른 순위경쟁은 무의미하죠. 세계 대학과의 무한경쟁을 내다보고 우리학교의 위상을 높이려 쉬지 않고 뛰고 있습니다”

사랑이 담긴 지도와 연구의 여정
“어릴 적 어떤 책에서 발견한 ‘인생의 위대한 목표는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명언이 생활신조가 됐어요. 그 후 목표를 위해 치밀한 계획과 집중력, 추진력을 갖고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죠. 우리나라 부국강병을 위해 중요한 원동력은 사회 기간산업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라고 생각했고 한양대에서 토목공학의 길을 걷는 발판으로 삼았어요”

천 교수는 후학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가끔은 사는 주위를 둘러보려 노력해왔다. 서울시의 토목 발전 뿐 아니라 모두가 살기 좋은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데도 이바지했다.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할 때마다 받는 이의 기쁨보다 주는 사람의 기쁨이 크단 것을 느꼈다.

“사랑의 연탄 배달에 참여해 혹한에 흘린 땀방울은 사랑과 젊음을 느끼게 했고 자선단체에 기부해 마음의 풍족함을, 종교단체에 대한 기부를 통해서는 마음의 평온함을 얻었습니다. 올해 벌써 만 60세에요. 학교에선 원로 교수죠(웃음). 정년퇴임까지 5년을 남겨두고 있어요. 앞으로도 서울시에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참여해 발전에 일조하고 자 합니다”

그는 올해 안식년임에도 학교에 자주 출근해 자라나는 후학과 우리나라 산업발전을 위해, 또 학교를 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강의실에서 연구실로 돌아와 있는 당분간은 임기 중 소홀했던 BK21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학생들의 박사 논문 지도에 전념할 계획이다. 모든 일이 시행착오 없이 진행되도록 늘 고민하며 실행하려고 노력 중이다.

서울특별시 토목상은 상패와 상장뿐이다. 상금이 있었다면 후학을 기르는 데 보탰을 거라며 웃음 짓는 그의 표정에서 학생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오늘도 그가 있기에 한양, 그리고 서울 토목의 앞날은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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