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그대들의 촛불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그대들의 촛불
  • 정혜인 기자, 최서현 수습기자
  • 승인 2008.06.04
  • 호수 12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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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익숙지 않은 풍경들

분명 익숙한 길입니다. 같이 걷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항상 그 길을 따라 걷곤 했습니다. 보고 싶은 전시회가 열리면 전시를 보고 난 후 그 길을 따라 여운을 되새기기도 했습니다. 여름 날, 그 길 위에 놓인 넓은 잔디광장에선 맥주 한 캔에 더위를 식혀보기도 했고, 청계천에선 발을 담그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습니다. 그 길, 세종로는 분명 기자에게 익숙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세종로는 한없이 낯선 풍경들로 가득합니다.

여름이라 저녁 7시가 되도록 해가 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하나, 둘 씩 촛불문화제 참가하기 위해 자리를 잡습니다. 가져온 신문지를 깔기도 하고 그냥 맨바닥에 앉기도 합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 어수선한 분위깁니다. 빨간 바탕에 ‘너를 심판한다 나를 연행하라’라는 글귀가 적힌 피켓을 나눠주는 사람, 이명박 정부와 광우병사안에 관련한 주장이 빼곡하게 실린 종이를 나눠주는 사람, 종이컵에 양초를 끼고 “촛불 받아가세요”라고 외치는 사람까지 집회 준비에 한창입니다.

앞쪽에는 집회를 진행하는 무대가 보이고 그 뒤에는 여러 언론사의 방송용 차량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철창이 달린 소위 ‘닭장차’가 즐비하게 도로 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 차 주위에 있는 전경들도 아직은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저런 모습들에게서 어떻게 ‘폭력’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들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오빠ㆍ형’ 일 텐데 말입니다. 방패를 준비하고 대열을 정비하는 그들의 모습에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며칠 동안 집회를 진행하느라 쉰 목소리로 외치는 진행자가 무대에 서있습니다. 먼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가사의 노래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아주머니 한 분이 아이 손을 잡고 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시간제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정유나<서울시ㆍ노원구 38> 씨 입니다. “촛불집회 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공감해요. 촛불집회의 진실된 모습은 보도가 안 되고 있어 직접 보기 위해 왔어요. 아이들, 학생들 모두 알아야 될 문제이기에 아이와 함께 오게 됐어요”

폭력시위가 일어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씨는 아이와 함께 왔습니다. 무섭지는 않냐고 물으니 그녀는 “촛불집회엔 여자와 학생들이 오히려 더 많이 오는 것 같아요. 실정법 위반에 대한 것이면 몰라도 촛불집회 자체를 ‘폭력’시위 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주장이에요. 이러한 평화 집회를 도구로 진압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이에요”라고 답합니다.  교복을 입은 중ㆍ고등학생들, 정장을 입고 온 회사원들, 아기를 데려와 아이 옷에 “저에게도 배후 세력은 없어요”란 문구를 적은 아이엄마까지 모인 사람들은 다양하지만 그들의 손에는 모두 촛불이 들려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
자유발언을 하라는 사회자의 요청에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합니다. 경상북도에서 집회참여를 위해 올라왔다는 아저씨는 지방에서도 이러한 집회가 열렸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집에서 나올 때 부인이 ‘우리 형편에 무슨 집회참여냐’고 말렸답니다. 그런 부인에게 그는 “우리 형편이니까 집회를 참여해야 한다”고 했고 그의 대답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큰 박수를 보냅니다.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여대생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명박아! 소고기는 너나 먹으라”고 외칩니다. 그녀의 울음에 사람들은 “울지마, 울지마”라며 위로를 더합니다.

다음 차례는 경찰청인권위원회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경찰’이라는 단어에 듣고 있는 사람들이 야유를 보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준비해온 내용을 읽습니다. “집회 관련한 법에는 여러분들을 연행할 타당한 근거가 없습니다”란 그의 말에 큰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수원에서 온 김진석<수원시ㆍ팔달구 28> 씨는 그의 의견을 듣고 반색합니다. “거리 집회할 때 시민들은 비폭력을 외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명박의 행동이 국민의 건강, 행복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점, 시민의 뜻에 역행한다는 점에서 불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한 쪽에서 말다툼이 생긴 듯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 왜 사람들 얼굴만 찍느냐”며 대열에 앉아있던 시민이 따져 묻습니다. 집회가 시작할 때 진행자가 소위 ‘프락치’를 조심하라고 했던 경고 때문입니다.

첩자라는 의미의 프락치는 지금 집회 참여자들에게 가장 예민하게 들리는 단어입니다. 경찰 쪽에서 ‘프락치’를 집회하는 시민으로 위장시켜 참여자들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소문이 있어 기자가 아닌 듯 한사람이 얼굴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으면 피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이 기자인지 일반 시민인지 아니면 정말 프락치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그러한 사람을 의심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집회참여자들에게 서글프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오후 11시 경, 전경버스가 청계광장 사방을 막아섭니다. 방패를 든 전경들이 줄을 맞춰섭니다. 시위대는 이에 맞서 “불법주차 차 빼라”고 외칩니다. 집회에 몇 번 참가해 봤다는 박선아<서울시ㆍ용산구 25> 씨는 지난 달 26일, 전경들과 시위대의 몸싸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경찰들 방패 내려!”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어스름이 깔리고 촛불은 어둠 속에서 더 빛납니다. 시민들 손에 손에 들려있는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 불빛에 울컥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곳으로 오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두발로 이곳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의 노력이, 불빛이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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