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론’의 등장
‘남북국시대론’의 등장
  • 한양대학보
  • 승인 2008.04.06
  • 호수 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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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백두산 정계비를 둘러싼 조선과 청의 국경 분쟁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국경과 영토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이 지역에 있었던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주목케 했다. 이는 조선후기 사회의 모순에 비판적인 실학사상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역사인식을 낳았다.

고대사와 관련해서는 유득공이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후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병존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남북국의 역사를 쓰지 않았다고 비판함으로써 신라 삼국통일에  회의적인 견해를 제기했다. 남북국시대론은 지리학자 김정호를 거쳐 한말의 신채호까지 이어졌다.

한말의 애국계몽 운동은 내부적으로 낡은 구체제를 극복하여 근대사회로 나아가고(계몽) 외부적으로 외세의 침탈을 막으며 국권을 회복할(애국)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때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것이 바로 전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민족’이었다. 이에 따라 민족의 입장에서 새로운 역사 해석이 요구됐다.

신채호는 신라가 외세를 불러들여 같은 민족을 없애는 것은 도둑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같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나아가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반 쪼가리 통일이라고 비판하며 ‘삼국이 합하여 양국이 된 시대’ 즉 양국시대론을 제기했다. 남북국시대론은 1920년대 전반까지 지속됐지만 식민지 치하에서 단절됐고, 오히려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론으로 무장한 일본의 만선사학이 역사연구를 주도해 나갔다.

만선사학은 만주와 조선의 합성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한 뒤 중국의 동북지역(만주)으로의 침략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어다.

이때의 ‘만주’는 중국사와 무관함을 강조하기 위한 지리적 개념이었으며, 그에 따라 만주의 역사로서 고구려와 발해가 주목됐다.

고구려와 발해가 만주의 역사라는 논리는 다시 예맥과 삼한을 별개의 종족으로 구분하는 논리로 나갔다. 따라서 만주와 분리된 조선사에서 한반도 남부를 처음으로 통일한 통일신라는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만주사로서의 고구려와 발해의 설정은 통일신라론과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두 개의 나라로 나눠져 건국 된 남과 북은 모두 독립국가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서술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단일국민의 문화’를 형성한 기초라는 점에 주목해 통일신라의 의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발해를 간과하고 한반도 남부의 통일에만 주목했다는 점은 만선사학의 영향이었다.

1960년대 이후 남북한에서는 실학 이래의 남북국시대론을 계승하며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고구려의 옛 땅에 세운 나라라는 사실에 입각해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서 파악했다.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과제와 함께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한민족으로서의 신라와 발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던 것이다. 민족 형성의 계기를 삼국통일에서 찾는 입장에서는 남북국시대론의 문제 제기에 대해 ‘한민족 형성사’에 발해가 포함되지 않았고, 신라와 발해는 서로 적대적이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고려가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였고 10만 명 이상의 발해 유민을 동족으로 우대한 사실 등을 염두에 둔다면, 한민족 형성의 관점에서는 고려의 민족 통일이 신라의 통일보다 더 강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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