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가는 학번제, 호칭의 딜레마
무너져가는 학번제, 호칭의 딜레마
  • 장형수 기자
  • 승인 2008.03.24
  • 호수 12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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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학번문화라는 건, 그 출생은 군대문화이지만 성격은 동아리나 학생운동 같은 대학문화 자체에 의해 형성된 것이 많습니다. 인식의 차이를 만드는 건 ‘호칭’을 나이로 할 것이냐, 학번으로 할 것이냐의 기준 문제인데, 이는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부터 재학생, 그리고 몇 년 만에 복귀하신 복학생 분들까지 누구도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학번제가 잘 유지되고 있는 학과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간은 학번과 나이를 혼용하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학번문화는 과거 학생운동의 영향이 가장 크긴 하지만, 대학이라는 공간 자체가 평등과 공동체 의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형성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연을 위주로 하는 동아리의 경우를 생각해보죠. 신입생 중에는 기량이 뛰어난 친구도, 엉망인 친구도 있을 겁니다. 냉정한 사회라면 기량이 뛰어난 친구는 바로 무대의 주인공으로, 엉망인 친구는 평생가야 조연밖에 안되겠지요.

하지만, 대학 동아리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신입생이라도 바로 무대에 올리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것을 암묵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의식이 있는 2학년은 기량의 차이가 있더라도 공평하게 무대에 오르고, 신입생들은 아무리 잘나도 공평하게 무대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능력보다는 열정을 높게 사는 아마추어리즘은 대학문화의 생명입니다. 그걸 이끌어 가는 조직 운영 원리가 바로 학번제였구요. 신입생은 뭘 해도 용서가 됩니다. 하지만 2학년은 책임의식이 필요한 실무급이 되죠. 여기서 한 학년이 더 올라가게 되면, 핵심 간부급이 됩니다. 인생의 순환이라고나 할까요. 기존의 제도권 교육이 유보시켰던 사회화를 뒤늦게 대학문화 속에서 습득해 가는 겁니다.

하지만 최근에 학번제가 무너져가고 있는 모습은 아마 인터넷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습니다. 대학생만의 특정 영역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제는 중ㆍ고등학생도 마르크스를 읽을 수 있고, 니체를 논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학생이 조금 더 세련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뿐이죠. 과거에야 대학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특권도 부여됐었고, 졸업 후의 진로도 확연히 달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은 특별히 지성인이라는 자의식도 없고, 사회적 의무감 따위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사회에 무지한 고등학생이 새롭게 눈 뜨는 대학생으로 자라나는 세상이 아니라 고등학생의 수준은 높아지고, 대학생의 수준은 낮아지면서 서로 고만고만해진 세상이 됐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호칭 때문에 길거리나 술자리에서 서로 인사나누기 불편한 분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현재의 대학과 공동체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서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건 어떨까요. 엄밀히 따지면 나이와 학번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이든 학번이든 ‘권위적’이라는 탈을 쓰면 누구나 불편해지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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