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대학보
  • 승인 2007.05.14
  • 호수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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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보 창간축사-한양대학보 주간 이현복<인문대ㆍ철학과>

붓다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법이 있나니. 성스러운 팔정도를 일으킴에 이로움이 많도다. 그 한 법이란 무엇인가? 그는 착한 벗이니라. 비구들이여, 착한 벗을 가진 비구는 성스러운 팔정도를 배우고 익혀서 그 공을 쌓게 될 것이 기대되느니라.”

붓다에게 ‘성스러운 팔정도’란 바르게 보는 태도(정견), 바른 행위(정사, 정어, 정업), 바른 생활(정명), 바른 수행(정정진, 정념, 정정)으로, 우리를 반야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런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법이 다름 아닌 착한 벗이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착한 벗이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에 해당된다”는 제자의 질문에, 붓다는 성스러운 길의 절반이 아니라 그 길의 전부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불교에서 도반이라고 불리는 착한 벗, 착한 동지는 참나를 찾기 위한 고행의 동반자다. 힘든 수행, 고독한 수행에서 좋은 친구는 커다란 위안이고, 그와 나누는 우정은 해탈과는 또 다른 기쁨이다.

우정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이라고 한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는 강조한다. “우정은 미래를 향하여 밝은 빛을 투사하여 영혼이 불구가 되거나 넘어지지 않게 해준다는 것이네. 진정한 벗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영상을 보는 것이네.

벗은 눈앞에 있지 않을 때도 거기에 있으며, 가난해도 풍족하고, 약해도 강하며, 죽었다 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네.” 단테가 동경의 여인 베아트리체가 죽은 뒤 이 책을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고 하는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에 있는 말이다.

“벗이 있어 먼 데로부터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했던 공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좋은 벗과 나누는 우정은 혈연에 의한 사랑을 제외하면 가장 탁월한 사랑이자 미덕임에 틀림없다. 혈연에 의한 사랑이 부족사회의 근간이었다면, 이해에 의한 우정은 폴리스를 유지시켜주는 토대다.

가족이 아닌 낯선 타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시민사회이고, 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타인과 나누는 우정이며, 나아가 이 우의에 의해 타인은 더 이상 섬뜩한 타자가 아니라 친근한 벗으로 나타난다.

붓다, 공자, 키케로가 좋은 벗과 우정을 그토록 강조한 것도 그것들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궁극으로는 자유롭게 해주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삶에서 좋은 벗과 우정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1학기 개강이후 지금까지 대학본부, 교수협의회, 총학, 직원노조 등 학내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학과 통폐합 문제로 학생들이 본관 총장실로 쳐들어가는 불상사도 있었다. 새내기 세미나를 통해서 들여다 본 우리 새내기들의 일상 삶에서 좋은 벗과 우정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이질적이다. 우리 청년들에게 착한 벗의 의미는 차라리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와 가깝다.

5월 15일이 한양대 개교 68주년이자 한양대학보 창간 48주년이고 또한 스승의 날이다. 구성원들 각각 축사를 낭독하고 덕담을 나누는 의미 있는 시간들이다. 한양대라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주체들이 서로를 좋은 벗으로 진정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래서 상호 간에 분유하고 있는 우정으로 인해, 벗의 슬픔에 내가 울고 내 즐거움에 벗이 춤추는 그런 우정을 그려내고 있는지 자문해 볼 때다. 아니 이것도 과하다면, 벗의 슬픔에 내가 웃고, 내 즐거움에 벗이 울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지 반추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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