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백 세 시대의 사랑
[장산곶매] 백 세 시대의 사랑
  • 김다빈 기자
  • 승인 2024.03.18
  • 호수 1579
  • 7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다빈
                                                               ▲ 김다빈<편집국장>

 

나를 구성하는 어떤 취향들은 많은 번거로움을 동반한다. 가령 휴대폰 앱 대신 엘피판으로 음악을 듣는다거나 굳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일. 엘피판으로 음악을 듣기 위해선 잘 닦아 관리한 바이닐을 전축 위에 올려 알맞은 위치에 바늘을 맞추고, 때가 되면 판을 뒤집어줘야 한다. 필름 사진을 찍으려면 매번 필름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며칠에 걸친 필름 현상을 기다리는 건 필수다.

이런 비효율적이고 수고로운 행위를 굳이 해가며 취향을 지켜내는 이유는 옛 방식들에서 오는 아날로그 감성에 대한 동경이다. 한때는 치기 어린 마음에 나의 취향이 곧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작은 반기라 생각하기도 했다. 이후엔 ‘남들과 무언가 다른 나’를 대변해 주는 수단이라 여겼다. 일부러 수첩과 연필을 들고 줄 이어폰을 썼다. 문의는 디엠으로 부탁드려요, 하는 인스타 감성 카페 같은 건 같잖다고 비웃으면서 대신 대학로의 학림다방과 신촌의 미네르바를 다녔다. 번거롭고 귀찮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낡고 오래된 생활 양식이 곧 멋있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필자가 이런 생활 방식을 두고 ‘힙하다’고 즐길 수 있었던 건, 언제든 요즘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원한다면 휴무일을 인스타로 공지하는 그 카페를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 매번 음반을 교체하고 필름을 현상하는 과정이 귀찮다면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고, 직접 손으로 글을 쓰기 힘들 땐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활용할 줄도 안다.

그러나 이처럼 낡고 오래된 것들만이 유일한 생활 방식인 이들이 있다. 통학하는 필자는 학교를 오갈 때 마다 수많은 노인과 마주한다. 시간대를 막론하고 4호선 지하철에선 많은 노인들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고, 밀치고, 끼어든다. 마치 이곳이야말로 백 세 시대의 현주소라 말하듯. 이러한 광경을 마주할 때면 꼭 백 세 시대의 불행을 목도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한때는 필자도 노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때가 있었다. 뻔뻔한 표정으로 임산부석에 앉아있는다거나,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모습을 볼 때면 화가 나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와 맛집 웨이팅을 기다리던 중, 한 노인이 점원과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내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이 먼저 들어가냐며 화를 내는 노인과, 귀찮은 듯 노인의 예약 번호를 묻는 점원. 그리고 그 뒤에서 광경을 지켜보며 수군대는 청년들. 그러게 ‘민첩한 하루’ 되시지, 알바생 불쌍하다, 같은 수군거림들. 무언가 잘못돼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젊은세대에게 맞춰진 기술은 노인들을 완전히 소외시키고 있었다.

한 사람이 태어나 백 년을 사는 시대다. 불로장생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과학기술의 곁에서 백 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이전보다 훨씬 많다.

누군가는 노인들을 위한 의료 시스템이 충분하니 이만하면 살기 좋은 사회라 말한다. 심지어는 일하지 않고 연금과 기초생활수급만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을 마치 기성세대가 짊어져야 할 짐처럼 취급한다. 이런 사회에서 누구나 태어나면 꼼짝없이 백 살까지 살아야 한다니. 끔찍하다.

엘피로 듣는 좋은 음악이나 간혹 보물처럼 발견하는 잘 찍힌 필름 사진 같은 것들이 필자를 살게 한다. 숨 붙이고 생존하는 것 외에도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많은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당연하게 누리는 문화적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사람도 변화해야 한다지만, 하루가 달리 급변하는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만의 노력을 요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래서 우린 노인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애정 어린 인내와 배려가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백 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사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