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비장애 사이, 700만 경계선 지능인이 있다
장애와 비장애 사이, 700만 경계선 지능인이 있다
  • 강은영 기자
  • 승인 2023.12.04
  • 호수 1576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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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에게 성폭력을 당한 A씨는 자신의 피해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염전 노예 사건의 피해자 B씨도 수년 간 임금을 받지 못했지만 왜 돈을 주지 않느냐 따지지 못한다. 이들에겐 ‘경계선 지능’이란 공통점이 있다. 어딘가 다른 경계선 지능인, 이들은 누구일까?

‘경계’ 위에 선 사람들
경계선 지능이란 IQ가 71~84 사이의 지능을 일컫는 말이다. 경계선 지능인은 △기억력 △상황대처 능력 △이해력 △판단력 등이 일반인보다 떨어져 배우는 속도가 느리고 대인 관계를 어려워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이유로 경계선 지능인은 △‘느린 학습자’ △‘더딘 아이’ △‘학습부진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경계선 지능은 지적장애와 다르다. 지적장애의 기준은 IQ 50~70 사이인데 경계선 지능인의 IQ는 이 기준보다 약간 높다. 김인향<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는 “경계선 지능인은 지적장애는 아니지만 평균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보다 지능과 환경 적응 수준이 떨어져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계선 지능인은 간소한 IQ 차로 장애인으로 인정되지 않아 지적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다양한 복지를 누릴 수 없다.

경계선 지능인은 인구에서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지난 7월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표한 ‘경계선 지능인 현황과 향후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IQ 정규분포도 상 전체 인구의 약 13.6%은 경계선 지능인으로 예상된다. 최성진<동명대 임상심리학과> 교수는 “이 계산법에 따르면 국내에 약 700만 명은 경계선 지능인이며, 한 학급으로 치면 3~4명꼴로 있는 것이다”라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경계선 지능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절실한 교육, 그러나 현실은?
경계선 지능인은 교육 현장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 교수는 “경계선 지능인은 △교우관계 △학교생활 부적응 △학업성적 부진 등 여러 고충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문의는 “경계선 지능 아동은 일반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하지만, 지적 장애인 보다 인지 기능이 좋아서 지적 장애인 대상의 도움반이나 특수 학교에서도 어울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경계선 지능인에게 보통학교 수업은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이고, 지적 장애인 대상의 특수교육은 너무 쉬워 교육적 사각지대에 놓인단 것이다.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계선 지능 아동은 성인이 된 후엔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최 교수는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경계선 지능인은 취업 시장에서 쉽게 낙오될 수 있다”며 “직장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왕따나 괴롭힘을 당하는 등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김 교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우울증에 걸리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될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 이상동기 범죄를 일으킬 수도 있다”며 “사회적으로 방치된 경계선 지능인이 사회적위험지수*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경계선 지능인 맞춤형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이것마저도 녹록지 않다. 경계선 지능 지원의 근거가 될 상위 법령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경계선 지능인의 평생교육 지원에 대한 조례가 있으나, 조례별로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용어조차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며 지원책도 제각각이다. 이에 대해 김경열<영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경계성 지능인의 특성과 요구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개별적인 지원 정책을 논의해야 한다”며 “현재는 이를 보장하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경계선 지능인에게 맞춘 체계적인 교육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조례를 아우를 상위 법안이 필요하단 것이다.

경계선 지능인, 범죄의 타깃이 되다
경계선 지능인은 범죄에 노출될 위험성 또한 높다.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법적 보호가 부재하단 점을 범죄자가 악용할 수 있으며, 경계선 지능인은 범죄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려워 또다른 범죄의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 27일 경계선 지능인 C씨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혔다. C씨의 IQ는 74로 평소 인지력과 현실 검증력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편이라 전했다. 오픈채팅에서 알게 된 피의자는 C씨에게 자신도 정신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며 동질감을 형성한 뒤, 피의자의 자취방에 올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C씨는 “이를 거부할 때면 피의자는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며 “두려운 마음에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피의자는 C씨가 경계선 지능인인 것을 이용해 성폭력을 저질렀음에도 법원으로부터 겨우 징역 6개월을 구형받았다. 이에 대해 C씨는 “낮은 형량에 납득할 수 없다”는 심정을 밝혔다. 피의자는 경계선 지능인이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단 점을 악용했으나 법망을 피한 것이다.

현재로선 경계선 지능인을 보호하는 맞춤형 법안이나 지원은 없다. 경계선 지능인 피해자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박 변호사는 “대체로 경계선 지능 피해자는 수사관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네’라고 답하거나, 사건 진술에 큰 두려움을 느껴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며 “지적 장애인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의 관한 특례법」의 적용대상으로 피의자 형량도 무겁고 수사 과정에서도 맞춤형 조력을 받을 수 있으나, 경계선 지능인은 그렇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경계선 지능인은 범죄에 노출되기도 쉬운 동시에 타인의 범죄에 이용될 위험도 크다. 박민서<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변호사는 “보이스피싱의 경우 상부 조직이 자금 조달이나 인출 등의 모집 공고를 내면 경계선 지능인은 그게 범죄인 줄 모르고 가담하는 경우가 있다”며 “의도치 않게 공범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경계선 지능인‘만’을 위한 법, 드디어 국회에 등장하다

지난 4월 국회의사당 앞에서 허영 의원과 시민단체가 경계선 지능인 지원법을 촉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 지난 4월 국회의사당 앞에서 허영 의원과 시민단체가 경계선 지능인 지원법을 촉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최근엔 경계선 지능인 지원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국회도 이에 응답하고 있다. 올 한 해 동안 국회에서 발의된 경계선 지능인 관련 법안만 무려 3건이다. △「경계선지능인 지원에 대한 법률안」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에 대한 법률안」 △「경계선지능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다. 

▲ 지난 7월 경계선 지능인 지원법 제정추진연대가 출범했다.
▲ 지난 7월 경계선 지능인 지원법 제정추진연대가 출범했다.

특히 지난 4월 발의된 「경계선지능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은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지원을 담은 첫 상위 법령으로, 경계선 지능인 관련 시민단체 및 가족들에게 지지받았다. 대표 발의자인 허영<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해당 법안은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용어 정의 △실태조사 △생애주기별 지원 등을 주요 골자로 한다”고 설명했다. 기존에 ‘경계선 지능인’, ‘느린 학습자’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던 용어를 재정비하고,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경계선 지능인 실태조사를 실시하겠단 것이다. 또한 특정 시기에만 제도적 보호를 받지 않도록 생애주기별 맞춤 지원 규정이 담겼다. 허 의원은 “사회적 약자 대상의 복지 정책의 최종적 목표는 자립”이라며 “법안이 통과되면 체계적인 지원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돼 경계선 지능인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기대감을 보였다.

세상은 장애인와 비장애인이라는 이분법으로 완벽히 구분되지 않는다. 지능의 스펙트럼 속 회색지대에 머문 경계선 지능인이 사회의 일원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과 보호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서야 겨우 세상의 관심을 받게 된 경계선 지능, ‘회색지대’에서 ‘안전지대’로 가는 이들의 여정에 응원을 보낸다.


*사회적 위험지수: 사회 위험에 대한 국민의 인식 수준이다.

도움: 김경열<영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박민서<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변호사
최성진<동명대 임상심리학과> 교수
허영<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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