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끝낼 수 없는 이야기
[2023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끝낼 수 없는 이야기
  • 권현범<국문대 한국언어문학과 19> 씨
  • 승인 2023.12.04
  • 호수 1576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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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 계급, 정치 : 김혜진론 -

1) 지금 여기, 김혜진

현대문학사에서 노동문학은 70년대와 80년대의 전유물로 제한되어 파악되는 경향이 있다. 70년대의 산업화를 거치는 과도기 속에서 극도로 심화된 계층 간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80년대에 이르러 박노해, 백무산 등 노동자 출신 문인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90년대 이후 노동문학은 한국문학의 주류에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갈래로 남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노동은 우리 사회와 삶의 주요한 화두이며 문학이 간과해서는 안 될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최저임금, 주4일제, 중대재해처벌법 등 노동 규정을 둘러싼 많은 논의들이 계속되고 있는 한편, SPC 공장 노동자 끼임 사고, 봉화 광산 매몰 사건, 안성 추락사고 등 산업재해로 하루 평균 5명이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노동문학의 필요성은 2023년 현재에도 물론 유효하다. 다만 그것은 7, 80년대의 노동문학을 그대로 되풀이해서는 안 되며, 달라진 노동환경의 쟁점을 첨예하게 반영하고 깊이 성찰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노동의 형태를 반영하는 노동문학의 필수 요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현재의 노동문학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반영이 있어야 한다. IMF 이후 급격히 증가된 비정규직 고용은 평생직장이란 개념을 지워버리며 수많은 노동자를 고용불안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둘째, 현재의 노동문학은 서비스직의 증가를 반영해야 한다. 80년대 노동의 주역이 작업복을 입은 생산직 공장 노동자였다면, 지금의 노동자는 공장 노동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전체 취업자의 65.2%가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회사에서 요구하는 감정과 표현만을 고객에게 보여주는 이른바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 김혜진의 소설은 지금 이 시대의 노동을 숙의하는 소설로서 위의 조건에 상당히 부합한다. 그것이 지금, 여기, 우리가 김혜진을 비평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김혜진 소설의 등장인물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이다. 통신회사의 설치기사(9번의 일)부터 요양보호사(딸에 대하여), 재개발 지역 철거 용역(한밤의 산행), 치킨 배달부(치킨런), 상담원(아웃포커스)에 이르기까지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직업 군상이 등장한다. 이들이 맡은 직무나 급여는 제각기 다르지만 모두 노동 중에 사회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9번의 일‘9은 저성과자로 분류되며 사직 압박을 받는다. 교육대상자가 되어 업무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도서의 감상문을 쓰게 된다거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업무를 강요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9은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찾아본다는 선택지는 끝까지 고르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때 ‘9의 심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시간 회사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연결감 때문이다. 노동은 단순히 생계유지의 수단을 넘어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회사로부터 버림받은 ‘9은 생계유지의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과 깊숙이 연결되었다고 믿었던 회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여기서 회사는 지극히 카프카적인, 즉 실체가 보이지 않는 환상적인 관료집단이다. 그에게 보고서를 강요하는 PIP 교육센터의 감독관도, 부조리한 업무 지시를 내리는 국장도 회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일부분일 뿐, 회사의 실체가 될 수 없다. 거대한 송전탑을 보며 회사의 실체를 느꼈다는 결말부의 대목은 다소 주의해서 봐야 한다. ‘9이 깨달은 것은 회사의 뚜렷한 실체가 아닌, 회사와 자본, 노동의 추상성이기 때문이다. 9번의 일은 오랫동안 근무한 회사에서 받는 사직 압박의 문제, 무리한 대출을 받아 가며 매수한 부동산 문제, 장인과 장모의 간병 문제, 모친의 집수리 문제 등 한국의 중년 남성이 겪는 보편적인 사건들을 다루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지극히 추상적인 회사’, ‘자본’, ‘노동에 대한 사유로 치닫는다.

2) 노동 : 옳고 그름의 바깥

그는 보란 듯이 3번의 다리를 걸고 힘껏 떠밀었다. 3번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이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무릎을 감싸 쥔 3번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요. 일이라는 건 이런 겁니다. 얘 다리가 왜 이렇게 된 줄 알아요? 그까짓 옳고 그른 것 구분을 못 해서 다리병신이 된 줄 압니까? 일이라는 건 결국엔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좋은 거, 나쁜 거. 그런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해요?

- 9번의 일206

‘9은 거점센터에서의 무의미한 잡무와 격렬한 노조투쟁을 거쳐 변두리의 작은 마을 ‘78구역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그는 통신탑 설치를 반대하는 시민들과 대치하며 통신탑을 설치해야 하는 임무를 받는다.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는다. 순수한 선의의 마음으로 길을 잃어버린 개의 주인을 찾아주기도 하지만, 정작 주인의 태도는 그가 통신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더없이 딱딱해진다. 그때 그는 도덕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이후 ‘9은 한없이 잔인한 행위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노동은 ‘9을 옳고 그름의 바깥으로 떠밀었다.

회사니 노조니 종규 살아 있을 때 얼마나 힘들게 했습니까? 마지막 가는 길인데 가족들이 보내주셔야죠. 노조장으로 장례를 치른다니. 언제 할 줄 알고요? 그렇다고 회사 인간들. 그 인간들은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못 믿습니다. 종규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요. 회사나 노조나 뭘 했습니까.

상현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도 무슨 말인가를 보태려고 했다. 그러자 종규 아내가 작정한 듯 고개를 들고 그와 동료들을 올려다보았다.

너희는 뭘 했냐.

그렇게 묻고 있는 듯한 그 두 눈을 그는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 9번의 일118

이 장면은 또 어떤가. 종규는 5년간 아무런 직책도 직무도 없이 보내왔다. 그저 능력과 경력에 맞는 일을 달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위독한 병에 걸려 죽은 종규의 장례를 둘러싸고 회사와 노조가 신경전을 벌인다. 노조와 회사에서 서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제의한다. 아내는 둘이 제시하는 조건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죽은 종규의 친구들은 어디에도 붙지 말고 가족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회사나 노조나 한 일이 뭐가 있냐고 말한다. 그때 아내는 그럼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라는 시선을 보낸다. 친구들은 옳고 바름의 관점에서 종규의 장례를 보려 하지만, 아내에게 옳고 그름을 따질 여유가 없다. 공부도 시켜야 하고 나중엔 결혼도 시켜야 한다. 그녀에겐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다.

김혜진은 현실 앞에서 도덕이 무력해지는 순간을 곧잘 포착한다. 미애의 미애는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어린 딸 해민을 키우고 있다. 그녀가 아파트의 독서모임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자신이 일하는 동안 아이를 보살펴 줄 이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에서 거론되는 교양있고 정의로운 주제들에 대해 미애는 무관심하다. 때로는 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당장 몇 달 뒤 이사할 집도 구하지 못했으며, 몇 년 뒤에 학부모가 될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문제가 닥쳐올지도 알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북극곰과 플라스틱 조각을 삼키는 고래까지 걱정해야 하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거였다.

- 2022 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미애) 200

고작 200만원을 대출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미애에게는 북극곰의 앞날은 진심으로 걱정해줄 여유가 없다. 당장 내일 먹고 살기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옳고 그름의 문제를 따지겠는가. 독서모임의 학부모들과 미애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선우의 처우를 두고 극명화된다. 독서모임의 학부모들은 뒤에서 미애를 험담하며 심지어는 임대동 사람은 독서모임에 받지 말자고까지 말한 선우를 올바르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제명해버린다. 딸을 보살펴줄 선우가 절실했던 미애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여기서 학부모들의 도덕은 실패한다. 그것은 물론 올바름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내린 결정이었을 테지만, 진정으로 미애를 이해하지 못해 그녀를 곤궁에 내몰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애의 의향을 묻지 않고 결정했다는 것은 그들의 도덕에는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결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딸에 대하여는 도덕을 상징하는 딸과 현실을 상징하는 엄마의 대립으로 구체화된다. 대학원에 재직 중인 딸은 동성애 문제로 대학에 해고된 동료들을 위해 시위에 나간다. 별안간 얼굴에 멍이 들어 돌아오기도 한다. 딸은 옳고 그름의 문제에 천착하여, 올바름을 위해서는 세상과 불화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는 한국계 입양아들과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젠이란 여자를 한편에서 딸과 겹쳐 본다. 평생 옳고 그름의 문제에 매달렸으나 이제는 한 명의 치매 노인이 되어버린 젠의 인생을 보며, 엄마는 딸의 미래를 어렴풋이 그려본다. 엄마가 다른 요양원에 보내진 젠을 집에 데려오는 돌발행동은 물론 젠을 향한 연민 때문이지만, 그것은 딸과 그녀의 레즈비언 연인을 향한 충고의 성격도 강하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의 수고로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것의 지난함. 실은 나는 아름답고 고결해 보이는 이런 일의 끔찍함과 가혹함을 딸애와 그 애에게 알려 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 애들이 다만 책에서 읽거나,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 딸에 대하여183~184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옳고 그름만으로는 따질 수 없는 끔찍하고 가혹한 현실이다, 라고 엄마는 말한다. 엄마는 딸의 레즈비언 성향에 반대한다기보다는, 끝내 남들과는 다른 길을 택하려는 딸의 고집에 반대한다. 딸에 대하여은 딸이 아닌 엄마의 시선에서 쓰인다. 김혜진의 소설은 영웅을 주목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매력적인 인물보다는, 윤리와 현실의 갈림길에서 현실을 택하는 나약한 인간이 중심에 온다. 현실이란 옳고 그름의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김혜진은 말하고 있다.

3) 계급 : 아비투스와 독사적 태도, 일루지오

부르디외는 특정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성향이나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 체계를 아비투스’(Habitus)라 명명한다.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습성은 믿음을 낳고, 그 믿음이 소세계를 구성한다. 이때 자기 사회를 그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세계로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를 독사적(doxa) 태도라고 한다. 어떤 프롤레타리아는 구조적 부조리를 개선하려 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안주한다. 부조리한 상황이 그들에겐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독사적 태도는 그렇게 다음 세대로 이행된다. 즉 계급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불과 나의 자서전의 남일동 사람들이 그러한 예이다. 남일동은 재개발의 광풍조차 피해 간 허름한 달동네다.

몇 달 전 식탁에서 무심코 남일동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일생을 통틀어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은행 빚을 내는 부담을 감수하고 경매에 뛰어들고, 무리하게 집을 사고팔며, 달산이 올려다보이는 그 동네를 악착같이 떠나온 것이라고 말입니다.

- 불과 나의 자서전29

운 좋게 행정구역의 변화로 남일동 주민에서 중앙동 주민이 된 주인공의 가족들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낀다. 부르디외는 부르주아지, 프티 부르주아지, 민중 계급의 세 집단을 구별하는데, 프티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지를 향한 열망과 동시에 민중계급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주인공의 가족들이 남일동을 혐오하는 것은 이런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주혜는 그런 남일동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마을버스를 들여오고, 벼룩시장을 열고, 재개발을 돕는다. 단적으로 말해, 주혜의 혁명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남일동 주민들이다. 그들은 지금의 남일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변화하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변화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주혜의 복잡한 과거가 밝혀지며 혁명은 수포로 돌아가지만, 이는 필연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남영동의 주민들에게는 변화를 거부할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왜 이곳을 못 떠나는지 아니? (...)

돈 때문이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 거다. 저 사람들은 자기가 돈처럼 대단한 걸 절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지.

- 중앙역194

중앙역 노숙자들의 독사적 태도는 돈을 번다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 그들은 돈을 너무 대단한 것으로 생각해서 감히 자신이 노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노동 없는 삶, 주거공간과 자본이 없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운 좋게 돈을 얻어도 하루 만에 술값으로 탕진하는 등, 내일을 고려하지 않은 소비를 한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습관은 또다시 잘못된 믿음으로, 더 나아가 계급의 재생산으로 이어진다.

부르디외는 독사에 대한 애착을 일루지오(illusio)라고 표현한다. 게임을 뜻하는 라틴어 루두스(ludus)에서 나온 말이다. 부르디외 사회학에서 그것은 사회적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거기에 몰두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을 일컫는다. 쉽게 말해,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명예를 갖기 위해 매우 진지한 태도로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그것은 돈과 명예가 그만큼 노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합의에 의해 이뤄진다. 불과 나의 자서전에서 남일동을 벗어나려는 주인공 가족의 몸부림은, 남일동이 남일도라는 표현을 해야 할 만큼 표준적인 마을과는 다른 낙후된 공간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합의되었기에 발생한다. 9번의 일에서 다시 본사 직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이 죽는 일도 무시해버리는 ‘9의 태도는 그만큼 회사의 일원이라는 상징자본과 그에 따른 급료, 즉 경제자본이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발생한다.

4) 정치 : 감각적인 것의 분배

랑시에르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의 문제는 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문제이며 그런 한에서 예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관계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감성은 혁명의 수식어가 아니라 목적어다. 감수성이 풍부한 이들이 주도하는 혁명이면 좋겠다는 뜻이 아니라, 감성에 대한, 감성에서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문학의 장에서 밀려난 소수자들, 이를테면 성소수자, 이민자, 장애인을 다시 불러오는 것. 소수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감성의 분할이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소수자가 보는 세상을 표현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표준적인 시선에 대항하는 것. 그들의 감성을 그들답게 남겨 놓는 것이다.

중앙역은 노숙자들이 살아가는 날 것의 세계를 그려낸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왜 노숙자가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오직 광장이라고 하는 노숙자들의 피부가 맞닿는 공간만을 표현할 뿐이다. 어떤 독자들은 그가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딱한 사정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독자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킬 구슬픈 사정은 생략되고, 이곳에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악다구니만 남는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의 도덕의식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는 도덕적인 인간은 아니다. 길거리의 다른 노숙자들과 치고받고 싸우며 그들을 위협하는 것은 예사고, 돈을 벌기 위해 동네를 부수고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임신한 청소년을 모텔로 데려가 성욕을 해소하고는 낙태비용의 일부를 떼가기도 한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멈칫한다. 어쩌면 이 장면 이후로 독자들은 그에게 향했던 연민을 철회할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을 불쌍하고 선량한 약자로 보았던 독자들의 생각은 배반당한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자신의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그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여자를 돕고 싶으니 여자를 돕고, 여자를 구하고 싶으니 여자를 구한다. 도덕의식을 갖고 도운 게 아니었다. 그게 주인공의 전부다. 이제 독자들은 그를 도와줘야 할 약자로 보지 않고, 다른 세계에서 다른 감성으로 살아가는 낯선 주체로 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중앙역이 정치적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

문학적 정보가 유통되는 (우편) 제도로 인해 문학적 장이 존재하며, 정치적 정보가 유통되는 (우편) 제도로 인해 정치의 장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악마적 우편 제도는 새로운 우편 미학과 우편 정치학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악마적 우편물을 통해 우리는 제도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는 공간, 사실들의 권역에서 우편배달부의 죽음과 수취인의 실종을 알리며 새로이 열리는 그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171

진은영은 문학을 우편에 빗대어 논하며, 선교사적 교화를 수행하는 제도로서의 우편 모델(프로파간다 문학)과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꾀하는 악마적 우편제도(모방과 감염의 문학)를 구분한다. 만일 중앙역이 노숙자의 딱한 사정을 말하며 노숙자 처우의 개선을 주장하는 문학이었다면, 그것은 제도로서의 우편 모델이 되었을 것이며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품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노숙자 자체의 시선에 몰두하면서 독자를 낯선 곳으로 이끌고 들어가 새로운 감성을 발견한다. 여기서 정상인-노숙자라는 이분법적이고 일방적인 관계가 무너지며, 낯선 감성의 분배가 시작된다.

5) 결론 : 월급사실주의자의 초상

장강명은 한 인터뷰에서 후장사실주의의 반대급부로 월급사실주의를 내세운다.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작가 자신의 직장경험을 녹여내는 현실적 글쓰기를 시도하는 정세랑, 정아은, 임성순, 심재천, 이혁진 등의 작가군을 일컫는다. 이 리스트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김혜진이야말로 월급사실주의라는 표현에 알맞아 보인다. 장강명이 쓴 맥락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혜진의 소설은 월급 앞의 현실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월급사실주의자라는 표현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린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대두 이후로 문학이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계속되고 있다. 살아 있는 삶에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 자체가 옅어지는 작금의 한국문학에서 김혜진 문학이 갖는 현실성은 상당히 높이 평가할만 하다.

그러나 김혜진의 소설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나머지 서사로서 밋밋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현실의 부조리에 당차게 저항하는 영웅적 인물상이나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 초인적인 개성을 가진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끝없이 냉혹한 현실만이 등장할 뿐이며, 인물은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그저 휩쓸릴 뿐이다. 그러니 인물이 가진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현실성을 부각하기 위해 의도된 바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계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김혜진의 소설은 비정규직 문제, 서비스직 증가, 부동산과 재개발 문제, 노인인구 증가와 요양의 문제 등 변화하는 시대상과 노동환경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급격히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그에 따른 사회변화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컴퓨터의 발전, 그리고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현재의 노동은 한 차례 더 변화하고 있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변화하는 시대질서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기술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물론 김혜진의 문학적 관심이 하층계급과 소수자를 향해 집중되어 있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가 노동 문제를 개별화하고 사태에 대한 개인의 정서적 반응을 기록하는 데 멈출 위험이 있다. 노동문제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려면, 사회를 움직이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논의가 필수적이다. 아직 김혜진의 논의는 사회의 총체성보다는 개인의 정서적 반응에 머물러 있다. 앞으로 김혜진이 얼마큼 새로운 시대상을 총체적으로 반영할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올라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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