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디스거스트(Disgust) 유토피아
[단상] 디스거스트(Disgust) 유토피아
  • 문정현<인문대 국어국문학과 19> 씨
  • 승인 2023.09.04
  • 호수 15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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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문정현<인문대 국어국문학과 19> 씨

 

혐오는 날이 갈수록 정교하게 발전하고 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이성적인 사고도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 혐오가 주류 의견을 대표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황궁아파트 한 동만 온전히 보존되어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살아남기 급급했던 사람들은 어느새 유일하게 남은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이유로 ‘혐오(Disgust)’를 시작한다.

황궁아파트 주민이 아닌 생존자들은 혹한에 아파트 밖으로 내쫓겨 얼어 죽는 최후를 맞이한다. 국회의원이든, 20년을 아파트에 헌신한 경비아저씨든 주민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자비란 없다. 이들은 아파트 주민으로부터 인간도 아닌 ‘바퀴벌레’로 낙인찍히고 만다.

바퀴벌레라고 해서 다 같은 바퀴벌레는 아니다. 부녀회장(김선영)은 “바퀴벌레 대부분이 드림팰리스 인간들이잖아요. 우리 아파트랑 학군 겹친다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데...” 부녀회장의 말에 따르면 주민들의 ‘바퀴벌레’에 대한 혐오는 이미 혐오 당한 자들의 이유 있는 혐오였던 셈이다.

홀로 살아남은 아파트가 죽음으로부터 안전할지는 몰라도 혐오로부터는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다. 일말의 온정을 가지고 바퀴벌레들을 집 안에 숨겨준 주민들은 ‘배신자’로 또 다른 혐오의 대상이 된다. 전세로 거주하는지, 자가로 거주하고 있는지를 두고 차별해야 한단 한 주민의 교묘한 혐오를 마주할 땐 혐오의 끝은 어디인가를 생각하며 냉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혐오가 현실의 혐오와 다를 바 없단 점은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극한의 상황이 아닌데도 혐오가 넘쳐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국적 △성별 △입학 전형 △전공 △정치 성향 △지역 △학교 등 분야를 나누고 또 그 세부 분야를 나눠보자면 끝도 없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정보는 당장 몇 년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전달된다. 그러면서 삶이 윤택해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혐오의 표현이 우리 사회의 주류로 등장했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

‘개딸’, ‘퐁퐁남’ 등 최근의 혐오 표현은 특별한 누군가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을 평범한 사람들이 퍼 나르고, 평범한 사람이 혐오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작은 사회 안에서의 ‘혐오’는 곧 공동체의 평범한 일상이 된다.

‘유토피아’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라는 의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 주민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지만,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디스거스트 유토피아’는 뭘까. 혐오가 가득 찬 ‘디스토피아’일까, 혐오가 사라지고 모두가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유토피아’일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한 모순적인 표현이었던 만큼 디스거스트 유토피아 역시 모순적인 표현이다. 혐오와 유토피아는 공존할 수 없는 관계다. 고로 이대로라면 우리는 혐오로 가득 찬 디스토피아에 금세 도달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다.

혐오를 마주했을 때 당신의 반응은 어떠한가. 재미있다는 이유로 별생각 없이 혐오를 수용하여 내재화하지는 않는가. 혹은 앞장서서 혐오를 만들어 내고 있진 않은가. 거창해 보이지만, 이미 우리 일상에 녹아 있는 평범함이 만들어 내는 공포다. 커뮤니티에 댓글을 다는 것도, 게시물을 퍼 나르는 것도, 노골적인 표현에 ‘좋아요’를 눌러 찬성을 표하는 것도 모두 소극적인 듯 보이는 적극적 동조다.

의견이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악마화해선 안 된다. 의견이 달라 제 갈 길을 가는 것과 상대를 적으로 돌려세우는 것은 절대 동일시될 수 없다. 누군가의 흠결이 보이더라도 그것을 상대의 다른 부분과 연관 지어 비난하지 말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혹자는 부녀회장의 말처럼 혐오엔 이유가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혐오 역시 표현의 자유다. 하지만 평범한 나비의 날갯짓에서 시작된 혐오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는 파도가 되어 모두를 덮친다. 그 표현의 의미는 파도를 거치며 점점 넓어져 결국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단지 당신이 누군가 설정한 어떤 분류에 속한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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