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우수] 내 안을 파고들 용기
[2022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우수] 내 안을 파고들 용기
  • 임채윤<정책대 정책학과 19>씨
  • 승인 2022.11.28
  • 호수 1558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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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 제목을 직역한다면 ‘세상 최악의 인간’인 이 영화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는 꽤나 너그러운 제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최악의 인간’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주인공 ‘율리에’의 적나라한 욕망과 선택을 주인공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율리에는 애인인 ‘악셀’의 출간 파티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초대받지 않은 결혼식 피로연에서 낯선 이와 은밀하고도 섹슈얼한 행위를 한다. 그녀가 영화 내내 보여주었던 오류투성이의 모습을 대표하는 장면이다. 사랑에 있어서 파격적일 만큼 솔직한 율리에의 모습에 관객 또한 구석에 묻어놓았던 날것의 감정을 꺼내 보게 된다. 누구나 사랑할 때 느껴봤을 법한 모순적인 감정을 그려나간 영화는 관객에게 ‘세상 최악의 인간’은 ‘사랑하는 이들의 본모습’이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제목으로 번역한 것은 영화의 진의를 한층 더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노르웨이 오슬로를 배경으로 스물아홉 살 ‘율리에’라는 여성의 이야기가 12장 아래 그려진다. 챕터로 나누어져 소제목이 붙여지는 구성은 속도감 있는 전개를 가능하게 한다. 이야기의 큰 반전 축이 12장 중 ‘제2장. 바람피우기’에 있다는 것에서 이 영화의 속도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소제목은 각 섹션을 작가가 의도한 대로 방향 지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표지판과도 같다. 그러나 놀랄 만한 장면들이지만 해당 장면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하고 마주하여 재미가 떨어질 때도 있다. 12개 챕터의 구분만 존재하고 소제목을 없애, 해당 장면들에 대해 감상의 여지를 더 남겼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영화는 율리에가 느끼는 감각적 체험을 보여주기 위해 파격적인 극적 장치를 사용한다. 강렬한 극적 장치에 배우의 연기력이 따라오니 관객의 몰입은 어느새 감독의 손에 쥐어져 있게 된다. 영화에는 두 번의 극적인 연출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율리에가 기존의 애인인 ‘악셀’과 이야기하다 파티에서 만난 ‘에이빈드’를 떠올리는 장면이다. 커피를 내려주는 악셀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정지한다. 관객이 그녀의 상상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율리에는 모든 것이 멈춘 세상에서 지겹고 답답한 악셀 곁을 벗어나 파티에서 만났던 에이빈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그녀와 그, 둘만이 움직이며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 율리에가 자신의 육체는 악셀과 있지만 마음은 에이빈드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멈춰진 세상에서 악셀에게로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홀가분해 보였다. 그녀의 벅찬 감정은 표정으로부터 터져 나오며, 관객은 그녀의 심정을 강하게 체험하게 된다. 과연 포스터로 쓸만한 장면이다. 감독은 왜 이 장면을 이리도 공들여 찍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나 자신에게는 가장 솔직한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인가. 이 장면을 보면 자신의 오류와 모순적인 감정들을 맨눈으로 바라볼 용기가 생긴다. 마치 율리에가 된 듯이 말이다. 이 장면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우리는 그녀의 날 것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감독은 율리에를 통해 관객에게 자신 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율리에의 홀가분한 미소를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 지어 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상상을 구현해낸 것이기에 관객은 다소 과장되어 보일 수 있는 연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잘못하면 과한 연출에 몰입감이 깨질 수도 있던 극적 장치이지만 공감을 끌어내는 상상을 담백하게 구현해내면서 현명하게 표현해낸 것이다. 

 감독은 관객이 경험해봤을 법한 상상을 율리에의 관점에서 표현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관객이 경험해보지 않았을 법한 율리에의 체험에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에도 성공했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의 집에서 친구들과 마법의 버섯을 한 줌씩 나눠 먹는다. 마약 약초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며 율리에는 자신의 바닥이 꺼지고 새로운 세상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 몸이 늙어 살이 처지고, 어느새 아이가 젖을 물고 있고, 전 애인이 눈앞에 다가오기도 한다. 감독의 극적인 연출로 관객 또한 마약 약초를 직접 베어 문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과감한 연출력으로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다 준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 시점의 카메라 뷰로 율리에의 관점을 표현한 감독의 연출력은 과연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특정 나이대 혹은 특정 상황에 처한 여성 주인공을 필두로 그녀의 삶을 따라가는 영화적 시선은 최근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한국 영화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은 아이디어이며, 성폭행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한공주(2014)’와 경력단절의 상황에 처한 여성의 삶을 그린 ‘82년생 김지영(2022)’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처럼 여성의 불행과 사회적 외면에 초점을 맞춘 서사들과 달리, 이 영화는 여성 안의 원초적 본능에 초점을 두고 있다. 외부적 혼란보다 한 여성의 본능적이고 솔직한 내면에서 담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만들어진 여성의 이미지를 주인공에 투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남성과 다를 바 없는 욕구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사회에 의해 가공되지 않은 여성 서사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영화에서 율리에가 사랑했던 악셀이 누군가는 성차별적이라고도 생각하는 대사를 서슴없이 표현하는 만화작가라는 점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악셀은 자신이 그린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영화 홍보를 위한 목적으로 한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는데, 라디오 방송 중 페미니스트 출연자와 언쟁을 벌이게 된다. 반 페미니시트란 무엇이고 페미니스트란 무엇인가에 대해 감독은 특별히 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지만, 라디오 부스에서 말다툼하는 이 둘을 보며 ‘이러한 판단은 사실 내릴 수 없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페미니스트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각자 내리는 정의(definition)가 다른 상황에서 서로 각자가 내린 (반) 페미니스트의 정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규정하고 다투는 상황이 마치 허상과 다투는 것 같아 우습게 보인다. 라디오 부스에서의 공허한 토론 장면을 통해 감독은 이 지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각자가 만들어낸 정의로 갈기 찢어진 현세대 모습을 비춘 영화적 시선에 공감하며, 악셀의 역할 또한 재밌는 영화적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도 여성으로서 겪는 외부적 곤란이 존재한다. 바로 출산문제이다. 영화 초반부터 마지막 유산하는 모습까지 여성에게서 출산이 갖는 의미를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출산문제를 여성이 느끼는 부담으로 보여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율리에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촉발제로 사용하고 있다. 율리에는 아이를 원하는 엑셀의 말에 자신에게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강하게 이야기한다. 자신은 이것이 채워지길 원하기에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율리에가 아이를 경계하면서 추구하는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율리에는 영화 내내 자신의 삶이 언제 진정 시작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한 율리에에게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리자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삶을 경험해보지도 않고 끝내버리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삶의 조연인 것 같다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율리에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녀에게 삶이 진정 시작되는 순간은 자기 삶의 주연이 되는 순간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앎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추구하며 현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필터링 없이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관찰한 나의 지향을 따라갈수록 삶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난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하기 힘든 선택들을 율리에는 과감히 해나간다. 안정적인 의대에서 나와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찾아다닌다. 사랑에서도 지독하게 솔직하다. 어떨 때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시기를 느끼게 된다. 진정한 내면을 바라보기 위해서 사회와 타인의 시선이라는 무거운 필터를 자신의 힘으로 치워내기란 쉽지 않고 그렇게 마주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삶에 직접 투영시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율리에는 늘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나가는 질투 나는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율리에는 한 번쯤 누구나 추구해본 내 안의 진짜 자신의 모습을 왜곡 없이 바라보고 이를 행한다. 데카르트는 ‘내가 무언가를 느끼면(seeming)’ 곧 ‘그것은 존재하는 것(being)’이고 ‘내 안에 존재하는 것’ 중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즉,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직접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는 자신 안의 무의식이 존재하여 직접 관찰이 불가능한 심적 상태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특권으로 이 또한 관찰할 수 있다고 여긴다. ‘무의식’과 ‘일인칭 특권’ 개념을 자의적으로 변용해 적용해 본다면 율리에의 모습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아직은 무의식의 상태이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나의 모습은 나에게 드러나게 된다. 내가 진정 무엇을 원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더 솔직해질수록, 자신의 안을 깊숙이 들여다볼수록 무의식의 영역은 줄어들고 의식의 영역은 확대된다. 여기에서 율리에는 솔직함에서 더 나아가 용기를 발휘한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용기 말이다. 그녀는 어쩌면 자기 안으로 끝까지 내려가 보려는 탐험가인 것 같다. 진정 삶의 주인이란 내 안의 특권 영역을 넓혀가 나에 대해 직접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을 주관해나가는 힘을 가진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점에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내적인 탐험을 강행하는 율리에의 모습은 꽤 멋있는 것 같다. 

 

 다가오는 겨울, 영화를 보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용기를 경험해보는 것은 어떤가. 혹시 모르지 않나. 율리에가 지었던 홀가분한 표정을 자기 삶에서 지어 보이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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