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사랑의 (불)가능성
[2021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사랑의 (불)가능성
  • 김명윤<인문대 독어독문학과 18> 씨
  • 승인 2021.11.29
  • 호수 1540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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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Intro

내게 있어 사랑은 해석 불가능한 어떤 신비와도 같다. 그것은 구체화될 것 같으면 오히려 추상화되기 마련이고, 너무 추상화 될 것 같으면 오히려 구체화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국 불가해성을 그 본질로 삼은 어떤 신비라고 주장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란 어떤 초월적 가상의 개입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분명 존재하기에 체험 혹은 목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결코 이해는 할 수 없는 그런 신비를 의미한다. 이 신비를 어머니를 통해 처음 목격한 적 있는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카라마조예프가의 형제들>, <성경: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을 통해 그것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 나는 이 세 작품에서 배운 사랑의 특징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 같다. 살면서 나는 운 좋게도 사랑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한 가 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이와 관련된 질문이 들어오더라도 침묵을 지키거나 모른다고 대답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르는 방식으로 사랑을 가장 깊이 통찰하고 있었기에 사랑에 대한 말을 아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기 보다는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으며, 모름으로써 오히려 알 수 있는 어떤 신비였다. 그렇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들은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법한 이러한 신비를, 실은 그들 안에서 이미 체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동력 삼아, 타자를 자기 품속으로 끌어안을 줄 아는,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넘어서게 되는 불가능한 실천을 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유 없이 행해지는 그들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실천으로서 사랑은 많은 위험을 동반한다. 그것은 ''라는 존재를 해체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해체는 '내가 너에게서 나를' 혹은 '내 안에서 너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태껏 ''라는 존재를 지탱해온 고정불변의 자아상에 틈을 가해야지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해 보면, 자기 해체로서의 사랑이란, 내 안에 ''라는 타자를 기입하는 행위인 것이고, 너와 앞으로 함께 살아감으로써, ''가 실은 ''라는 존재의 가능조건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선언 행위인 것이다.

 

2.실천적 사랑에 대한 목격담

이러한 종류의 사랑, 즉 자기 희생적인 사랑, 무조건적으로 행해지는 사랑, 감각의 논리와 이 성의 논리 모두 통용되지 않는 사랑, ''를 넘어서는 사랑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내게 처 음으로 '보여준' 사람은 내 어머니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나는 매주 주일만 되면 긴장했는데. 그 이유는 신앙심 이 없는데도 어머니 따라 성당을 가야 하는 것이 스트레스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에 가면, 내 가 제일 무서워하는 얀이라는 친구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12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치가 내 부모님 보다 크고, 언제나 화가 나있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봤던 얀은, 성당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집이 성당 옆에 있어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성당 앞에 있는 공원에서 보냈다. 자폐증이 있어서, 정신연령이 4~5살 정도였던 얀의 입가에는 항상 침이 흐르고 있었 고, 손톱에는 시커먼 때가 껴있었으며, 이는 누렇고 반쯤 썩어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거 의 반포기 상태로 키웠는데, 이는 그가 항상 같은 옷을 입고도 씻지를 않아서, 찌든 땀 냄새를 풍기며 다닌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던 사실이었다. 그의 옆을 지나갈 때면 나는 언제나 숨을 참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그렇지만 얀을 정말로 무서워했던 이유는 그가 단지 더러워 보여서가 아니었다. 얀은 자신의 감정과 힘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이유로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하기라도 하면, 고막이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그렇게 해서도 분이 안 풀리면 가장 만만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얀이 그 누군가를 쫓아가서 때리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던 나는, 그 뒤로 얀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고, 나중에는 평소에는 믿지 않았던 하나님께 얀으로부터 나를 지켜달라는 기도를 수십 번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자발적으로 기도를 먼저 한 것은 이때가 아마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역시나 일어날 일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성당 가기 며칠 전, 나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새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라서, 결국 내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좋은 자전거를 타는 일인이 되었다. 성당 가는 날에도 나는 내 자전거를 뽐내고 싶은 마음에, 굳이 그 새 자전거를 타고 성당에 갔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것이 다가올 불행의 원인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성당 입구 앞에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던 얀의 눈에 좋은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는 내 모습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싱글벙글하며 자전거를 타는 내 모습이 한 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자전거에서 내리기 위해 속도를 줄이고 있던 나를 뒤쫓아오는 것이었다. 알아듣기 힘든 이상한 독일어를 내뱉으며 나를 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뛰어오는 그를 보자, 나는 순간 겁먹어서 심장은 마구 뛰는 데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다리까지 힘이 풀려서 페달도 제대로 밟히지 않았다. 여기서 잡히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겨우 페달질을 하는 데 성공했다. 생각한 것보다 속도가 빨리 붙기 시작해서, 잘만 하면 그를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누군가가 뒤에서 엄청난 악력으로 내 목덜미를 잡고는 자전거에서 떨어트리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얀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았지만, 나는 차마 멈춰서 뒤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계속 페달질을 하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무게중심을 잃고 자전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는데,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고 무릎만 살짝 까졌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가 나를 때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 앞에 서서 나를 째려보자, 나는 독사 앞에서 도망칠 엄두도 못 내고 떨기만하는 쥐처럼,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나를 자전거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발로 딱 한 번 걷어차고는, 나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내 자전거를 갖고 놀기 바빴기 때문이다. 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타는 방법을 몰랐기에 타는 시늉만 하며 그는 놀았다.

이 광경을 멀리서 목격한 어머니는 놀란 얼굴로 내가 있는 쪽으로 급히 달려왔다. 어머니가 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이제 어머니가 나를 대신해서 얀을 혼낼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괜찮냐고 물으며 상처부터 확인하곤, 나를 안아줬다. 그러고는 큰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미사가 시작했으니 나 먼저 성당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했다. 나는 어머니가 얀을 제대로 혼쭐내기 위해서 나를 먼저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곤, 속으로 통쾌해 하며 미사 드리러 갔다. 그러나 문제는 미사 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는 데도 어머니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누군가를 혼내는 데 미사 시간 전체를 할애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혹시나 무슨 일을 당했을 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성체를 받고난 다음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바깥으로 나갔다. 조급한 마음으로 성당 문을 열고 바깥에 나가자,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하곤 충격을 받았다. 그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 자전거를 얀이 타고 있었고 어머니가 뒤에서 얀을 잡아주며,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나 황당하고 화가 나서, 얀한테 맞았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눈가에 고이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에 대한 서러운 감정과 원망스러운 감정이 동시에 올라와, 그 광경을 계속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당으로 다시 들어간 다음 문을 닫아버렸다. 닫힌 문 앞에서, 나는 혼자서 소리 없이 흐느끼며, 방금 내가 본 건 잘못 본 것이고, 나는 아직 이 성당 문을 연적이 없다고 믿고만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러웠던 마음은 분노가 되고 또 그 분노는 결국 저열한 복수욕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성당 문을 박차고 나온 다음, 얀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당한 걸 그에게 똑같이 되갚아줄 생각이었다. 자기 자식을 때린 사람을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는 어머니도 미웠지만, 그 당시에는 얀이 더 미웠다. 그가 꼴도 보기 싫었다.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속으로 그를 어떻게 넘어뜨릴지에 대한 고민에 몰두 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얀이 엄마를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머리가 하얘지면서 두 발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멈춰버렸다. 움직일 수 없었다. 얀이 그토록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은 내가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교감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미니와 얀을 보자, 내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분노가 눈 녹 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부끄러움이 남았다. 당시에는 이것이 정확히 무엇에 대한 부끄러움인지는 몰랐지만, 이 부끄러움이 내가 평소에 느끼는 그런 불편한 부끄러움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희한하게도 이 부끄러움은 한 동안 온기를 잃었던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따듯하게 해주는 그런 기분 좋은 부끄러움이었다. 정확히 왜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당시에 나는 이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이 부끄러움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을 느낀 순간을 계기로 나는 내가 '정말 중요한 것'을 오랫동안 놓친 채로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한 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생각 없이 보낸 세월이 너무나 길었던 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미사 시간 전체를 얀과 시간 보내는 데 할애했다. 그러고는 이제 집으 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평소 나를 안아주었던 것처럼 얀을 꼬옥 안아주 곤,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는 길에 궁금해서 어머니께 물어봤다. "그때 왜 그런거야 엄마?" 그러자 어머니는 대답 대신 내게 미소를 지어주며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어머니의 따듯한 품속에서 낯선 얀의 냄새가 묻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굳이 숨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13년이 지나서 내가 20살이 되던 해에, 나는 어머니가 왜 내 질문에 대해 미소로만 답했던 건지 그리고 내가 그간 놓치고 살고 있던 중요한 것이 뭐였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몸이 편찮으셨던 어머니는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전 날 밤에 유언을 남겨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사랑하라'였다. 누구를 어떻게 왜 사랑해야하는지에 대한 말은 없었다. 어머니는 임종 직전에 맑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면서, 가족 잘 챙기고, 사랑할 줄 아는 대 인이 되라고 하시면서 마지막에는 내게 사랑한다고 하셨다...그렇다. 나는 그 당시 사건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던 것이다. 타자를 단순 나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그런 사랑이 아닌,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그런 실천적 사랑을 말이다.

 

 

3. Pity에서 Compassion으로

어머니는 내가 신부님이 되길 바라셨지만,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대로 된 신앙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기에, 그 말을 들을 때면 말없이 웃기만 했다. 견진성사까지 받은 가톨릭 신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며,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성경의 내용을 거의 다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일 화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한 번 읽어본 것만으로도 내 뇌리에 깊숙이 박힌 그 일화는, 예수님이 한 율법학자에게 들려준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얘기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한 유대인 상인이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돼서 쓰러져있는데, 이때 한 사제가 그를 발견하지만 그에게 동전 한 닢 던져주곤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 다음 행인도 그를 발견하지만, 그 또한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그에게 덮어주기만 하고는 사제처럼 지나가 버린다. 세 번째 행인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이었는데, 그는 죽기 일보 직전인 그 상인을 보자마자 자신의 짐 보따리를 풀고 바로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그런 다음 그를 안고서 어느 한 여관까지 달려가서는 여관주인에게 자기가 숙박비와 치료비를 낼 테니 그를 정성껏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떠난다.

사마리아인이 나오는 대목은 우리의 의식을 초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는 왜 그랬던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며 이 내용을 소화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이해 못하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은 형식 없이 내용으로만 존재하는 하나의 흐름으로서 존재하는 답이기에 우리의 언어로 구획하여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 추정해볼 수 있는 사실은, 그가 그렇게 행동하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타자와 교감하는 진정한 사랑은 단순 긍정이 아닌 위와 같이 이중부정로서 수동적으로 경험되는 사건이다. 그렇기에 실천적 사랑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에 의해 행해짐을 당하게 되는 거다. 이것이 핵심이다.

혹자는 사마리아인이 어떤 이해타산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었기에 혹은 정의관념과 윤리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실천을 행할 수 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을 몇 글자 적어보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어디서 학습한 정의 관념, 혹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스스로 터득한 윤리의식에 따른 '행동'을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오히려 사제와 두 번 째 행인이었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찬양하는 정의 및 윤리는 분명 아름다운 개념인 것은 맞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는 개념이다. 그 둘은 선한 파급력을 지녔지만, 문제는 그 파급력이 어디까지나 나와 타자와의 적정 거리를 전제한 상태에서만 발효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정의와 윤리는 사랑처럼 타자와 나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실천으로 결코 이어지지는 않는 보수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와 윤리는 타자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자신의 발걸음을 유보한다. 왜냐하면 정의와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 행위주체와 행위결과는 항상 분리 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행위 주체만이 일차 고려 대상으로만 상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의와 윤리의 차원에서는 너를 위해 나를 넘어서는 실천, 즉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사제와 두 번째 행인은 자신을 잘 지키는 방식으로, 즉 타자와 거리를 좁히지 않는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정의로운 개인주의자였던 것이다.

위의 내용을 밀란 쿤데라의 언어로 다시 정리해보면, 사제와 두 번째 행인은 유대인 상인에게 연민(Pity)'느꼈던' 것이고, 사마리아인은 반대로 그 상인을 '동정(Compassion, Mitgefühl)'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9장에서 쿤데라는 연민은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관용을 암시"하는 개념으로서,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연민한다면, 이는 우리가 그보다 우월한 위치에 혹은 넉넉한 처지에 있기에 "몸을 낮춰 그의 높이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연민의 배후에는 여전히 나와 너의 수직적인 위계를 상정하는 가치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누군가를 동정 한다는 것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만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에 동정은 쿤데라에게 있어 "고도의 감정적 상상력, 감정적 텔레파시 기술을 지칭하는 것이며, 여러 감정들 중에서 가장 숭고한 감정"인 것이다. 동정이라는 이 숭고한 감정은 실천적 사랑의 일차적 형태일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다.

 

 

4. 결단 (De-Cision, Ent-Scheidung)

앞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나와 너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랑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 랑은 ''라는 존재를 지탱해온 자아상에 균열이 가해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균열이 만들어낸 틈 사이에서 타자는 내 안에서 살아 숨 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이 '너에게서 나를', '나에게서 너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라는 낯선 존재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를 구성하고 있던 주관적 표상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이식을 받으면 우리의 모든 면역세포는 새로 이식된 장기를 불청객으로 인식하곤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장기이식을 받고 나면 반드시 면역억제제를 복용함으로써, 자신의 면역 기능을 강제로 떨어트려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식된 장기에 나중에 피가 돌지 않아서 썩게 된다고 한다.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를 향한 자신의 면역 반응을, 어떤 면역억제제도 없이 강제로 저하시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이를 흔쾌히 ''를 위해서 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이러한 면역반응 내지는 방어기제는 우리의 생존본능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축이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타의가 아닌 자의로 ''를 위해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나와 너를 구분지음으로써만 '나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학 철학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원죄는 사실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나로 살기 위해 ''라는 존재를 내게서 떼어내야만 하는 데, 이 과정에서 원죄는 필히 발생한다. 원죄는 살기 위해 너와 나를 구분 짓는 과정 즉 ''''''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나는 로 살아감으로써 매일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는 이 끔찍한 결론은, 지금 이 글을 쓰는 내게도 사실 감당하기 힘든 내용이다. 이러한 끔찍한 내용을 가장 잘 다룬 작가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옛날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했던 한 여인이 죽었다. 그녀는 이 땅에서 단 하나의 선행 도 하지 않았다. 악마는 그 여인을 잡아 화염의 호수에 던져버렸다.
그녀의 수호천사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 이 여인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선행을 한 것이 있는 지 기억했다. 마침내 천사는 이 여인의 생애 동안 했던 단 한 가지 선행을 기억했다. 그것은 바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구걸하는 여인에게 준 것이었다.

수호천사의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양파 한 뿌리를 가져와 불타는 호수 속의 여인에게 던져주어라. 여인이 그 양파를 잡으면 그 줄기를 끌어당겨 여인을 호수에서 건져내 라. 그러면 이 여인은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씀대로 천사는 불타는 호수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여인에게 양파 한 뿌리를 던졌다. '여인이여, 여기 이 양파 뿌리를 잡으시게. 내가 그대를 끌어 낼 터이니.'

그 말에 여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양파 뿌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천사는 줄기가 끊어질 세라 조심스레 양파 줄기를 끌어올렸다. 이제 거의 호수 밖으로 끌어올려질 때, 그 여인이 끌려올라 가는 것을 본 불의 호수 속의 다른 죄인들이 그녀의 다리와 온 몸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같이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 때 이 사악한 여인은 있는 힘껏 발로 차고 몸을 비틀어 매달린 사람들을 떨어뜨렸다.

'밖으로 빠져나가야 할 사람은 너희들이 아니라, 바로 나야! 이건 내 양파야. 너희 것이 아니야. 저리 가!' 여인이 이 말을 하자 그 즉시로 양파 줄기가 끊어졌다. 여인은 다시 불의 호수 속에 던져져 지금까지 불타고 있다. 이에 천사는 울며 떠나갔다."

여인은 살기 위해서 다른 죄인들을 발로 차버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게를 못 이긴 양파줄기가 끊어져, 다시 지옥굴 속으로 떨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봐야할 지점은 양파줄기가 끊어진 시점이다. 여인에게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던 양파줄기가, 그녀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걷어차 버리자 바로 끊겨 버린다. 지극히 인간적인 그렇기에 비극적인 그녀의 모습은 ''로 살기 위해 ''를 배척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발로 차버리는 행위, 에게서 를 떨쳐 내버리는 행위는, 실은 필연적인 자멸로 귀결되는 행위였던 것이다. 살기 위해 이와 같이 ''''''로 해체 분리되는 작업''결단' , Ent-Scheidung(독일어) 이라고 정의 내려 보고자 한다. ‘'의 안정된 삶을 담보하기에 위협하기도 하는 Ent-Scheidung의 문제는 우리 삶의 모순을 구성하는 근본요소임에 틀림없다. 결국 삶은 결단의 문제인 것이다. 결단을 위한 결단을 할지, 결단을 포기하는 결단을 할지 그것이 문제다.

 

 

5. 결론

지금까지 다룬 모든 내용을 종합해보면, 자기 해체로서의 사랑은 결국 내 안에 ''라는 타자를 기입하는 행위인 것이고, 너와 앞으로 함께 살아감으로써, ''가 실은 ''라는 존재의 가능조건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선언 행위다(=> 이는 곧 동정하는 것). 그리고 이 선언행위를 통해 ''라는 폐쇄적인 존재는 ''를 끌어안음로써 열린 존재로서의 ''가 될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러한 선언행위 배후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으며 나만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결단을 포기하는 결단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의 이해타산이 개입되지 않은 진정한 결단이 전제된 사랑만이 어떤 인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렇기에 이미 도래했지만 여전히 불가해한 신비로서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변화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언어로는 판독 불가능한 신비이기 때문이며, 또 이러한 신비에 우리는 매혹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하기에 사랑에 매혹 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사랑을 한다는 말에는 사실 어폐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어법은 항상 수동태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이유로 '하게 되는' 혹은 '할 수밖에 없게 되는' 어떤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랑이 존재론적인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사랑의 가능성이 도래할 때, 한 편의 다큐처럼 칙칙했던 우리의 삶은 극적인 변곡점을 지나 아름다운 드라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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