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현의 인생 플레이리스트
한주현의 인생 플레이리스트
  • 정다경 기자
  • 승인 2021.11.29
  • 호수 1540
  • 1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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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현 프로듀서

Babyface가 되고 싶은
저녁 6시 30분. 이때쯤이면 학교에서 돌아온 큰형이 항상 물었다. ‘오늘 NBA 농구 결과 어떻게 됐어?’라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직접 골 넣는 과정을 몸소 보여주며 큰형 앞에서 재롱을 피우던 소년이 있었으니, 그 소년은 바로 한주현 동문이다.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그의 끼는 학창 시절 무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을 추면서 무대를 누비고 다녔다. 

고등학생 시절엔 ‘흑락회’란 힙합 동아리를 결성해 직접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한 동문은 밴드 활동을 하던 형들과 쎄씨봉에서 연극하던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엔터테인먼트 기질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전했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 음악 쪽이었나?”란 기자의 질문에 그는 “그건 아니다. 어렸을 땐 화가도 하고 싶다가 외교관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늘 마음 한 켠으론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보이즈 투 멘’ 앨범을 너무 좋아해서 당시 5,300원이란 거금을 들여서 레코드를 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앨범 속 내가 좋아하는 노래마다 ‘Produced by babyface’라고 적혀있었고, 이는 다른 앨범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덧붙였다. 이에 한 동문은 자신이 좋아했던 음악을 만든 Babyface와 같은 프로듀서가 되고자 다짐했다. 훗날 고등학생이 된 그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작곡반 동아리에 들어갔지만 “이곳에선 작곡 활동도 안 하고, 축제 때 빛나지도 못해 아쉬웠다. 그래서 ‘내가 동아리를 만들어야겠다’ 싶어 흑락회를 결성하게 됐다.” 당시 아버지가 유명한 바리톤이었던 후배 집에 가서 음악을 만들던 그는 “작업용 컴퓨터와 미국 수입 CD까지 있어, 그때 좋아했던 미국의 ‘맙딥’ 그룹과 유사한 음울한 노래를 만들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유명 기획사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당시 오디션을 본 ‘라인’ 기획사에선 떨어졌지만, 메인 프로듀서가 김건모 프로듀서였다. 결과와 상관없이 오디션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학 진학을 앞둔 한 동문은 부모님의 반대에 막혀 본래 가고 싶었던 실용음악과에 진학하지 못하고, 본교 경제금융학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진보하는 JINBO
한 동문에게 음악이란 언어와도 같다. 음악은 생각을 나타내는 수단이자 복합적 감정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 너 좋아해’라고 말로 전하지 못하고, 마음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음악을 대신 들려줬다. 이처럼 음악은 내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언어”라고 덧붙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다른 나라의 음악을 들어도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어쩌면 그에게 음악이란, 인간 사회의 언어보다 더 높은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음악이란 ‘에너지’가 느껴지는 음악이다. 지난 2010년에 발매한 그의 정규 앨범 「Afterwork」는 실제 우울증으로 힘들어했던 자신을 위로하고자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던 회사에서 첫 사회생활은 “보호막이 사라진 상태에서 각종 풍파에 대처하고 여러 가지 불편한 감정들을 다루는 것에 서툴렀다”며 성장통을 겪었다고 한다. 해당 앨범에 수록된 곡에선 ‘걱정하지 마’, ‘두려움과 외로움으로부터 내가 널 지켜줄게’란 가사를 통해 그는 자신과 모두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같은 해 한 동문은 래퍼 Peejay와 함께 결성한 유닛 프로젝트 ‘마인드 컴파인드(Mind comfined)’를 통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해나갔다 . 당시 Peejay 노래의 △사운드 △작법 △정서는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치부돼 국내에선 ‘이런 음악 내면 안 팔린다’며 음반 회사에서 거절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에 그는 ‘그럼 내가 회사를 차려서 직접 팔아야지’란 생각으로 회사를 설립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한 동문이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
▲한 동문이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

흑인 목소리, 그 다음은?
이후 한 동문은 LA에 있는 ‘MI(Musicians Institue)’란 사립 음악 전문학교로 가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흑인을 동경했던 그는 “음악적으로 인정받고자 그곳에 가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 그를 지도했던 선생님은 흑인 노래를 완벽하게 구사하던 그를 인정했고, 동시에 ‘What is your voice?’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한평생 흑인 같단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고 이제 그 소리를 들었는데, 그다음엔 무얼 해야 하지?”란 고민을 하던 중 뉴욕에서 자란 JK와의 만남이 자신에겐 전환점이 됐다고 밝혔다.

K-POP를 좋아했던 JK의 호기심에 ‘한국 노래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안 듣는다’고 단호하게 답한 한 동문을 보고 JK는 ‘음악을 가려서 들으면 안 된다’며 그를 설득했다. 이를 기점으로 그는 한국 노래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KRNB 프로젝트를 탄생시켰다. 자신이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친구를 바라보면서 “내가 나의 값어치를 너무 낮게 봤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숙제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후 소녀시대 「Gee」를 리메이크 한 곡인 ‘Damn’을 작곡해 SM과 계약을 맺고, 나아가 △레드벨벳 △샤이니 △f(x) 등의 유명 가수의 송 라이팅 캠프에도 참여하면서 음악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갔다.

예전엔 자신의 노래에 대한 호응도에 따라 기분이 좌지우지되면서 초조함을 느꼈다던 그. 그러나 현재는 이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에 내 음악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단 1명도 없더라도, 나만은 내 음악을 사랑해줘야지’란 생각으로 꾸준히 마인드 컨트롤 한다고 전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도약, 단정 앞에서 갈리다.
그는 △방탄소년단 △빈지노 △크러쉬 등과 함께 음악 작업을 하며 다방면으로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나갔다.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그 스펙트럼을 넓히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유연한 사람’이 되고자 한 그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먼저 한계를 정해두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탄소년단과 작업할 당시 “아이돌 래퍼에 대해 힙합계와 마찰이 있었다”고 밝히며 “만약 그때 힙합 팬을 지나치게 의식해 그들의 섭외를 거절했더라면 소중한 기회를 놓쳤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그는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은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한 것처럼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늘 열려있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한 동문은 빈지노의 「Aqua Man」 곡 탄생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빈지노와 함께 드라이브 하던 중 귀여운 느낌의 노래를 만들고 싶단 그의 요청에 즉석에서 아쿠아맨 비트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이처럼 즉석에서 명곡을 만들어내는 그의 천재적인 영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에 그는 “여행으로 떠난 바닷가에서 종종 넋 놓고 있을 때면 ‘다른 직장인은 휴가도 없이 일하면서 바쁘게 살아가는데, 여유를 즐기며 음악에 몰두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면 그들에게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고 답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형식으로든 고마움을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영감을 떠올리게 된다.”고 밝혔다.

지난 2015년부터 한 동문은 우리학교 서울캠 인기 과목 중 하나인 ‘문화비즈니스와리더십’에 특별 연사로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그는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20대 초중반 나이엔 목표한 커리어를 3번 정도 실패해도 시간이 남는다”며 “‘도전했는데 잘 안되면 어떡하지’ 고민할 시간에 시원하게 실패를 각오하고 시도해봤으면 좋겠다”고 든든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피카소, 마일즈 데이비스처럼 아주 오랫동안 아이코닉한 사람이 되고 싶다”며 “사람들이 ‘난 50대 진보의 음악이 좋고, 그의 사고관은 60대일 때가 좋았다’고 말할 때까지 해마다 매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매 해마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 다가올 미래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해 보자. 
 

▲그는 자신을 '열려있는 삶'이라 표현하며 "'난 원래 이래', '난 여기까지만 할 수 있어'란 말로 스스로를 한계 짓는 것이 아닌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게 삶을 열어 둬야 한다"고 전했다.

정다경 기자 dk04051@hanyang.ac.kr
사진 제공: 한주현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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