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지식 쫓아 법의식은 뒷전
허울뿐인 지식 쫓아 법의식은 뒷전
  • 배준영 기자
  • 승인 2020.11.30
  • 호수 1522
  • 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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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학교 커뮤니티 및 각종 사이트를 통해 올라오는 강의 기출문제인 이른바 ‘족보’와 관련된 게시글이 눈에 띈다. 각종 사례를 통해 족보를 구하는 ‘족보 거래’가 성행하기도 하며, 족보를 두고 불공정성 논란에 대한 갑론을박이 펼쳐지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학생 A씨는 “족보 유무에 따라 공부 방법부터 성적까지 달라진다”며 “양심에 따라 족보를 쓰지 않지만, 불리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양심을 어기는 족보 공유·거래는 저작권법마저 어기는 불법행위일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박성호<법학전문대학원 지적재산권전공> 교수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의 인정 기준은 ‘창작적 표현’이므로 강의 기출문제가 저작권법의 보호 대상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높다”고 답했다. 실제로 ‘자신들의 교육이념에 따라 정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출제한 시험문제 질문의 표현이나 제시된 답안의 표현에 최소한도의 창작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시험문제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저작물에 해당한다(서울중앙지법 2006. 10. 18., 선고, 2005가합73377, 판결 : 항소)’고 명시된 판례 역시 존재한다. 

관련 법률인 저작권법 제30조는 ‘공표된 저작물을 영리적 목적으로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용하거나 한정된 범위 안에서 이용하는 경우 이를 복제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즉 저작물로 보호받는 기출문제 내용을 그대로 차용해 족보를 만들 때, 시험에 대비해 혼자 보는 정도라면 예외적으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작물의 권리자 허락 없이 불법 복제하거나 전송하는 순간, 금전적 이익과 관계없이 모두 저작권 침해에 해당한다. 이 경우 저작권법 제136조 제1항에 따라 최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은 불법 복제·전송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부담하게 된다. 

또 저작물로서 보호받는 기출문제 내용을 변형해 발췌하면 새로운 저작물, 즉 2차적 저작물이 된다. 2차적 저작물은 원저작물과 완전히 별개의 제작물로서 족보를 만든 사람이 저작권자가 된다. 그러나 2차적 저작물의 작성권은 원저작자에게 있으므로 원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허락받은 이용 방법 및 조건 범위 내에서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원저작물의 저작권이 인정될 때, 이를 허락없이 무단으로 작성하는 행위는 원저작자에 대한 저작권 침해가 성립된다. 물론 저작권법 제30조에 따라 저작권법 위반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족보 거래’는 결코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니다. 학교 측에선 지속적인 안내 공지를 통해 족보에 대한 거래 행위가 불법일 수 있음을 알리고, 거래 행위 적발 시 학교 차원에서 취할 적절한 조치를 마련해야 함은 분명하다. 익명을 요구한 ERICA캠퍼스 관계자 B씨는 “대부분의 족보 거래가 익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제재가 어렵다”며 “관련 사안이 학교 측에 접수되면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답했다. 한편 서울캠퍼스 장경선<교무처 학사팀> 차장은 “교강사를 대상으로 시험 시행 전 ‘출제 및 시험감독 유의사항’에 기출문제 관련 사항을 고지하고 있다”며 “시험 출제시 지난 학기와 다른 문제로 출제하고, 기출문제를 출제할 경우에 형평성 확보를 위해 학생 전원에게 사전 공개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기말고사부터 학생을 대상으로 ‘기출문제 매매가 부정행위’임을 안내하고, 학칙 제51조에 따라 ‘학생의 본분에 어긋나는 행위’로 판단될 경우 징계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안내할 계획”이라고 장 차장은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학생 C씨는 “족보 문제가 수면에 오른 것은 수년은 더 됐는데, 너무 늦은 대처라 본다”고 말하는 한편 “족보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험 문제를 출제함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학점 경쟁이 심화된 대학 사회 내 ‘족보’ 논란은 오랜 화두다. 분명한 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법의식마저 저버리는 족보 거래는 근절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의 요람’인 대학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족보 문제 해결을 위해 학생은 저마다 법과 윤리 의식을 갖추고, 학교는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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