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위플래시」 감상록
[장산곶매] 「위플래시」 감상록
  • 이예종 편집국장
  • 승인 2020.11.23
  • 호수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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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종<편집국장>

우리는 누구나 작든 크든 본인의 빛나는 무대를 꿈꾼다. 상상을 통해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무대가 그렇듯 조명이 켜진 시간보단 조명이 꺼진 시간이 훨씬 더 길다. 무대에 올라 찬란한 조명이 관객의 눈망울에 반사돼 반짝이는 모습을 보기 전에 우리는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어둠을 마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주저앉아 슬퍼할 시간은 없다. 영화 「위플래시」는 이 장막과 무대를 극단적으로 처절하게 표현한다. 최고의 재즈 밴드 드러머를 꿈꾸는 ‘앤드류’ 이야기를 하나의 선율로 들려준다.

교수 플레쳐에게 인정받기 위해 피, 땀, 눈물을 쏟는 앤드류의 노력은 광기로 변질한다. 광전사가 돼버린 앤드류는 교통사고 직후에도 무대에 서기 위해 뛰어간다.

드럼 스틱을 잡기 위해 연주자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도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앤드류가 영화에서 야망을 연주하기 위해 지불한 가장 비싼 값은 사랑이고 자기 자신이었다. 

앤드류의 모습을 보자면 원하는 무대에 오르기 위해 어떤 노력이 수반되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영화는 절망스럽게도 광기의 노력조차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야망을 연주하지만, 결국 악보의 끝에 다다르지 못하고 후회한다. 그렇기에 참으로 부질없고 부담스러워진다. 교통사고 후에도 뛰어가는 앤드류의 기괴한 모습을 보며 과장됐음을 느끼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은 앤드류와 비슷하지만 작은 광기 정도는 갖고 살아간다.

극 중 음악을 잠시 접은 앤드류는 플레쳐의 권유로 다시 최고의 무대에 올라간다. 그리고 빛나기 직전에 앤드류는 함정에 빠진 것을 알게 된다. 수치스럽게 내쫓겨 나가던 앤드류는 무대 뒤 장막 바로 앞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지 혹은 수치를 무릅쓰고 다시 무대로 올라갈지’ 도돌이표 앞에서 고민한다. 

무대로 돌아간 앤드류는 악보 없이 진짜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러닝타임 내내 앤드류가 고통을 흘리면서 걸어왔던 길이 하나의 악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앤드류의 무대가 ‘좋은’ 이유는, 결국 그가 완곡(完哭)했기 때문이며, 그가 완만(緩慢)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중간에 끊어진 연주에 열광하거나, 똑같은 음만 반복되는 음악에 흥분하는 관객은 본 적이 없다. 필자는 음악에 분명히 문외한이긴 하지만, 한 곡의 음악이라도 격동이 없으면 흥미를 일으킬 수 없는 것 정도는 안다. 

「위플래시」의 마지막 무대에선 음악영화의 클리셰, 기립박수 장면이 없다. 그 무대의 관객은 당신이기에 평가는 오롯이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당신이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면, 이는 광기로 점철된 무대의 찝찝함을 부담스러워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박수 친다면, 당신은 극한의 노력으로 완성된 무대의 짜릿함과 그 무대에 오르기까지 드러머가 지나온 고단한 노력을 이해하는 것이다. 평가는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

이제 무대는 당신이 올라설 차례, 빛나는 무대를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할지 「위플래시」를 통해 짚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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