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부문 가작] 네가 없는 이곳은
[2019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부문 가작] 네가 없는 이곳은
  • 정승윤<공대 융합전자공학부 14> 씨
  • 승인 2019.12.02
  • 호수 1505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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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말 오랜만에 밖으로 발걸음을 디뎠단다. 정오 즈음에 나갔는데도 날씨는 엄청나게 춥더구나. 날씨는 진즉부터 추웠는데 내가 몰랐던 것인지, 오늘따라 유달리 더 추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추웠다. 현관 앞을 나서자마자 코끝을 치고 지나가던 바람이 어찌나 에던지. 그러나 그때까지도 겨울을 실감하지 못했다마는, 한 걸음 더 내딛으니 그 바람에 실린 묵직하고 얼음 같은, 약간의 탄내가 담긴 겨울 냄새가 느껴져 기분이 새로웠다. , 어느새 겨울이구나.

그렇게 간만에 거리로 나가니 이곳은 여전하더라. 여전히 사람들은 분주하고, 하늘에는 자동차가 달리고. 겨울이라 곳곳에 있는 음식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예뻐 보였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조금 뛰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니? 믿지 못하는 듯 나를 볼 네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정말이다. 가슴이 꽤나 두근거려서 한동안 거리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단다. 가만히 사람들이 오다니는 걸 보고 있는 것도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야. 너와 같이 그 재미를 느꼈으면 하는데,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거리에 한참을 서 있으니 길을 지나던 한 학생이 내게 길을 잃었냐고 묻더구나. 에잉, 길을 잃다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말이야. 아마 내가 노망이 들어 잘 길 분간을 못하고 있는가보다, 생각했을 게다. 내 나이도 있고, 나처럼 멍하니 길에 서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지.

계속 그곳에 서 있으면 또다시 이목을 끌 것만 같아 발을 옮겼다.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같은 거리만 빙글빙글 돌다 결국에 간 곳이 동네 마트였다. 적어도 물건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 않느냐? 대부분이 다 거기서 거기이긴 하다만은.

돌다보니 아주 싱싱한 게가 눈에 띄더라. 아하, 이것 참 좋은 녀석들로다가 들어왔군. 크고 팔딱팔딱 뛰는 것이 아주 맛나 보였는데, 너는 이제 이런 거 못 먹지? 하는 생각에 쌤통이다 싶었단다. 워낙에 맛나 보이기도 하고 너 골려 주려는 마음에 몇 마리 사고 싶었는데, 집까지 들고 갈 생각을 하니 힘들어 그만 두었다. 루시라도 데리고 나올 것을 그랬나 보아.

게를 사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마음아파하지는 말거라. 예전처럼 가격이 비싸다고 사지 못한 것은 아니다. 네가 떠나며 남겨둔 돈이 생각보다 많아. 내가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남겨 놓으면 어떡하느냐, 이 녀석아. 돌이켜 보니 게를 참 좋아하던 너를, 양껏 먹이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구나. 그것 비싸 보아야 얼마나 비싸다고, 먹고 싶은 것 못 먹게 한 것이 한구석에서 계속 켕긴다. 이제는 무엇이든 네 먹고 싶은 만큼 실컷 사 줄 수 있는데.

그러고 보니 너는 항상 마트 오는 걸 참 좋아했었지. 참 신기한 녀석이야. 어릴 적부터 마트 가자고만 하면 졸졸졸 따라오던 네가 생각나서 잠깐 웃었다. 다 큰 아저씨가 되어도 늦은 밤 퇴근길마다 그놈의 마트에서 작던, 크던 무언가를 하나씩 주워 오는 게 일상이고는 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는 참 지긋지긋했다만, 이제는 뭔가 가져올 놈이 없으니 집에 변화가 없다. 네 어미라도 있었다면 그래도 집이 달그락거리고 웃음소리도 들리고 좀 사람 사는 집 같을 터인데.

그래도 루시 덕분에 집이 죽은 듯 조용하지는 않아. 참 세상 좋아지기는 했지. 너는 그래도 열 살 즈음부터는 그런 로봇들을 보고 자랐으니 내 말이 와 닿지는 않을게야. 나 어릴 적에는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생에 이런 게 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하기도 했고.

어쨌든 루시가 밥하랴, 청소하랴 항상 분주하게 달그락거리기도 하고, 가끔 시답잖은 농담도 던져 주어서 그렇게 심심하지는 않다. 진짜 사람은 아니더라도, 루시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라고 생각한다. 루시가 없었다면 배는 심심했을 게다.

가끔 루시가 정말 사람이 아닐까 하고 착각이 들 때도 있다. 한 번씩 내게 잔소리할 때가 있는데, 어느 날은 그 잔소리를 듣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단다. 참 이상한 일이지. 밖에서 나가서 산책 좀 하라는, 고작 그 잔소리를 듣고 그렇게 슬플 줄은 나도 몰랐다.

나이가 드니 자꾸 말이 옆으로 새게 되는구나. 마트에 계속 있다 보니 답답해 오후에는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탁 트인 하늘이 보고 싶었다만, 오늘따라 하늘도로에 차가 어찌나 많은지. 계속 하늘에 줄이 지는 것이 보기 싫어 시내를 빠져나와 뒷산 전망대 카페로 향했다. 근처에 살면서도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면서, 왜 오늘에서야 갑자기 그곳이 생각나는지 참 모르겠더구나.

주말이라 사람은 꽤나 복작였지만, 카페는 좋았다. 평소에 잘 마시지 않던 차도 한 잔 시켜보고, 전에는 비싸다고 눈도 주지 않았을 조각케잌도 하나 시켜 보았단다. 폭신한 분위기 속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있으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부드럽게 귀를 메우는 것이 참으로 좋더라. 진작 너와 한 번 와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와서 같이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면 참으로 좋았을 것을.

하늘은 파라아니 예쁘더라. 정말로 구름 한 점이 보이지 않았어. 원래 겨울에는 날이 추울수록 하늘이 맑다더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더라. 누가 지워놓은 것처럼 깨끗한 겨울하늘이 이렇게 예쁠 수 있는 지도 오늘 처음 알았지 뭐냐. 알았다면 진작 많이 들여다보았을 텐데. 이번에는 더 늦기 전에 자주 보려고 생각 중이란다.

그런데 참으로, 하늘은 가까워 보이지를 않더구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땅에서부터는 이렇게나 멀어졌다는 것이 실감이 나는데, 이 만큼이나 높이 올라왔으면 하늘이 조금 가까이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아무리 올라와도 하늘이 가까워지지 않아 보이는 건지. 하늘과 나 사이를 가려주는 구름이 없으니 더 그 차이가 실감났나 보다. 그 차이마저도 너와 나 사이의 차이보다는 짧은 것 같아 약간은 서글펐다.

그러고 보니 내 건너자리에 앉았던 한 연인이 기억난다. 특별히 화려하거나 눈에 띄지는 않던 아주 평범한 연인이었다. 네가 이곳에 남아있었다면 아마 저들과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 같아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다만 두 내외가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큰 호응이나 맞장구는 없었지만,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그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 어쩜 그렇게 눈을 돌망돌망 뜨며 상대방을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게 계속 눈길이 가는 바람에 매우 고역이었단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나름 마음이 평온한 하루였었는데.

건너자리 연인에게 정신을 뺏겨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이 살짝, 노을을 비추려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사람들이 창밖을 보며 두런거리기에 나도 창밖을 바라보니 한 줄기 하얀 연기가 하늘을 가르고 있더구나. 또 다른 성간(星間)여행을 위해 또 하나의 우주선이 편도 표를 끊은 모양이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강하게 나를 때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온 몸을 휘몰아 감쌌다. 손발이 저릿저릿하고 식은땀이 흐르더라. 오늘 또 하나의 우주선이 또 누군가를 싣고 오른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사실에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사람들은 모두 창밖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소리를 죽인 채로 가만히 떠오르는 우주선을 바라볼 수밖에. 그 장면 하나에 어디선가 박수와 함성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저 어릴 적 네가 생각났다. 느지막이 내게 다가온 나의 보석. 어려서부터 우주를 참 좋아했던 네가. 어릴 적 받아쓰기도 잘 못하면서 별자리는 다 짚어내던 네가. 연두부 같은 그 하얗고 말랑한 손끝으로 별자리 책에서 이거어는 물꼬기자리이거어는 오리온자리짚어내던 너의 모습이. 밥 먹다 말고도 뛰쳐나와 벽에 붙어있는 별자리표를 바라보던 아이가. 마치 나에게 자랑하려 듯이 알파 센타우리부터 베텔게우스까지 척척 외우던 꼬마가 아른거렸다.

사실 초등학교 졸업 앨범에 적힐 장래 희망 칸에 자랑스럽게 우주비행사라고 적던 너도 기억났단다. 제일 존경하는 인물로 콜럼버스를 골랐던 너도 있었구나. 콜럼버스가 지구를 건넜던 것처럼 너도 우주를 건너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너는 사랑스러웠다.

시간이 많이 흘러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네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이었나 보다. 뉴스에서 우주선에 쓰일 공간도약기술 개발이 성공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 하교하자마자 흥분하여 나에게 일장연설을 하던 너였다. 한 발짝 다가온 꿈을 이루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네가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단다.

네가 열심히 노력해 네가 원하던 연구를 맡게 되었을 때, 나는 네가 자랑스러웠다. 미처 네게 말해주지는 못했지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연구를 이어나가면서도 반짝이던 눈빛을 잃지 않았던 네가 얼마나 멋졌는지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나는 네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네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내 인생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기에, 그랬던 너이기에. 내 평생을 바쳐도 아쉽지 않을 자랑스러운 보석이었기에, 나는 네가 떠나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사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곰곰이 돌이켜 보니 기억이 또렷하게 나지는 않는구나. 어렴풋한 그 때의 감정만 남아있는 모양이야. 그 날도 우주선이 발사되었지. 멍하던 나와 반대로 사방에서는 박수소리와 함성소리가 들렸던 건 기억이 난다. 아직 너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도 기억난다. 지금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저릿저릿했던 것도 기억이 나는구나. 괜찮다. 그것 때문에 자책하지는 말거라. 그게 어느 때였든 나는 준비되지 않았을 테니.

그래서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단다. 그 때, 아니 아무 때라도, 하나만이라도 내가 너를 막아섰다면 어땠을까. 별자리 책 대신에 동화책을 쥐어주고, 우주비행사 대신에 의사를 적게 하고. 뉴스 볼 시간에 공부하라고 타일렀다면 어땠을까. 그 날, 네가 가 보아도 되겠냐고 묻는 말에 가지 말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단다.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이 약간은 달랐을지도 모르겠구나. 네가 사라지지 않고 내 옆에 남아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저녁만 되면 또 이상한 것들을 손에 들고 집에 돌아올 네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일이 바빠서 자주 못 수 없던 네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지. 어쩌면 그럼에도 여전히, 네가 내 옆에 없었을 수도 있을 법하다.

나는 아직도 어떤 게 맞는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구나. 어차피 인생은 선택과 후회의 연속이 아니겠느냐. 아마 내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 답을 모를 듯싶다. 어느 게 더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만, 이거 하나는 말해 줄 수 있단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옳고 그름을 떠나 여전히 나는 너를 응원했을 것 같다고.

하늘에서는 우주선이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저편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멋진 경광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붉은 기가 살짝 비칠 무렵의 하늘 한 가운데에 한 줄기의 빛이 자취를 남기며 가르고 있었다. 남은 하얀 자취가 해에 비쳐 마치 흰 무지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우주선을 보고 있으니 참으로도 야속한 녀석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가는 사람이야 이미 떠났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겠다. 떠나는 곳은 새로운 곳일 터이니 우리가 그립더라도 잘 버텨낼 수 있지 않겠느냐.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니더냐.

여기 남겨진 나는 아닌 것 같구나. 저 우주선은 남겨진 우리는 생각해주지 않는구나. 아직 네가 남겨놓은 것들이 이곳에는 너무나도 많다. 너의 흔적이 아직 집 온 곳에 흩뿌려져 있는데. 그 흔적들이 눈앞에서 없어져야 생각이 나지 않을까도 싶어 다 버리려고도 해 보았다. 커다란 상자에 네가 남겨 둔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다 모아 한 번에 버리려고 했다. 참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들게 모아두었는데, 거기까지가 끝이더라.

막상 모으고 보니 버릴 수가 없더구나. 그 상자 하나에 네가 보이는 것 같아서. 그 상자만 열면 아직도 네가 튀어나와 나를 반갑게 안아줄 것 같아 그 상자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열어볼 수도 없었다. 상자를 열면 비로소 네가 없다는 게 실감이 날까 두려웠다. 그 위에 먼지가 소복이 쌓일 때까지 손도 못 대겠더구나. 이도저도 못하고, 결국 루시에게 치워버리라고 얘기했다. 루시가 그 상자를 버렸는지, 아니면 어디 한 구석에 숨겨두었는지는 모르겠다. 루시도 가끔 너를 그리워하는 듯 보이니 버리지는 않았을 듯 하다만.

카페에서 나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어느새 해가 넘어가던 길거리에는 네온사인들이 예쁘게 반짝거려 잠시 멈추어 서서 바라보았다. 작은 불빛들 사이에 구미 당기는 냄새가 풍겨 뒤돌아보니 네가 좋아하던 만두집이 보였다. 만두집을 가릴 만큼 희뿌옇게 올라오는 증기 사이로 고기만두와 김치만두를 반씩 담아 사 오던 네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도 모르게 만두집에 들어가 만두를 주문했다. 고기만두 반과, 김치만두 반을 주문했다. 만두를 받아들고 잠시 너를 생각했다. 약간은 떨리는 젓가락질로 만두를 집어 하얗게 마른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고기와 야채와 만두피가 씹혔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나름 열심히 씹기는 했다. 씹히기만 하고 삼켜지지는 않기에 반 넘게 남기고 나와 버렸단다.

만두집을 나와 다시 뒤돌아본 거리에는 네가 빼곡했다. 신발 가게에서 신발을 고르던 너와, 새로 생긴 음식점에서 새로 생긴 메뉴를 주문해보던 너와, 인형 뽑기에 돈을 날리던 네가,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였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네가 남긴 흔적들을 모아 치워버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네가 떠난 이곳이 아직 너의 흔적인데 말이다. 이곳에 묻은 너는 아무리 해도 씻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집에 돌아와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 루시가 내게 저녁을 준비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 입맛이 돌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창밖은 어둠으로 덮이고 있었다. TV를 켜 보니 온통 우주선 소식뿐이기에 꺼 버렸다. 간만에 적막 속에서 집을 바라보니 기분이 새롭더구나. 그 가운데 앉아 있으니 네가 없던 지난 시간이 불쑥 내게 와 닿았다.

벌써 몇 개월만 지나면 너를 보지 못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이곳이 아닌, 그곳은 어디인지, 그곳은 살 만한지. 그곳은 이곳처럼 아프고 힘들지 않은지, 그도 아니라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건지. 아직 나를 기억하고는 있는지 말이다.

이번 생에는 다시 너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내 사무치기는 해도, 영영 못 본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련다. 그렇게 생각해봤자 마음만 아프지. 무슨 의미가 있겠더냐. 그냥 멀리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하련다. 저 머나먼 우주 가운데 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다. 네가 간 곳이 어느 곳인지는 나는 잘 모르지만, 좋은 곳일 게야. 나를 떠나 간 곳이니만큼 좋은 곳이어야 할 게야.

이곳은 이제 겨울이 온다. 겨울이 다가오니 겨울에 떠난 네가 더 생각이 나는구나. 봄을 보고 가지 못한 네가 조금은 안쓰럽다. 내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니지만, 같이 맞이할 수 없던 지난봄이 여태 마음에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아마 다가올 모든 봄에도 너는 없겠구나.

이곳은 여전하다. 네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똑같다. 여전히 사람들은 분주하고, 길거리는 반짝거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울리는데도, 나는 여전히 고요하다. 모든 것이 똑같아 오히려 답답하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나는 여전히 살아갈 생각이니까. 네가 없다 하여 나도 이곳을 떠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가 아니면 이곳에서 또 누가 너를 기억한단 말이냐. 오늘은 그저 답답한 마음에 이리저리 주절거렸다. 이제는 나도 많이 익숙해져서, 네가 곁에 없는 게 많이 슬픈 건 아니지마는. 그냥, 무언가, 오늘따라 네가 좀 보고 싶구나. 네가 없는 이곳은, 아직 네 빈자리를 느끼는 나만 쏙 빼 놓고, 여전히 그대로다.

사랑한다. , 보고 싶구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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