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이스트를 위한 신문사
에고이스트를 위한 신문사
  • 강명수 수습기자
  • 승인 2006.08.27
  • 호수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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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수 <인문대 언어문학부>
한국 사람들은 ‘시작이 반이다’라고 말하고 일본사람들은 ‘절반부터 시작이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말하고 부정적인 사람들은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신문기자들은 반이란 걸 모른다. 기사엔 완전히 끝난 것과 아예 끝나지 않을 것, 두 가지밖에 없다. 기사가 데스크에서 통과가 되기 전까진 계속 수정해야 하고 심하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소나기 맞아가며 엄청 고생한 취재도, 두세 시간을 책상 앞에서 끙끙대며 써놓은 기사도. 데스크의 편집을 한 번 거치면 여지없이 잘려나가고 때때로 아예 폐기처분당한다.

애써 써간 기사가 아무것도 모르는(것처럼 보이는) 데스크에서 사정없이 잘려나가고, 나름 고심한 표현들을 제 멋대로 뜯어고칠 때면 정말 다 때려치고, 그렇게 잘났으면 직접 가서 기사 쓰라며 쏘아주고 싶어진다. 드라마를 보면 괜히 트집잡아 주인공을 괴롭히는 시어머니가 꼭 나오는데, 데스크가 딱 그렇다. 한 사람의 간단한 말이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지만 여긴 그런 사정 봐줄 만큼 여유있는 곳이 아니다. 이곳에서 나는 아직 실수가 허용되는 새내기 대학생이 아니라 책임있는 한 사람의 기자로 대접받는다. 내가 그럴 능력이 있건 없건, 그럴 마음이 있건 없건 여기 있는 난 이미 한 사람의 기자여야 한다. 나이가 아니라 능력으로 인정받는 공간이다.

처음엔 그게 못마땅했고, 사정을 봐주지 않는 선배들과 데스크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매일, 매순간을 긴장하고, 한 단어 한 문장까지 고민해서 써야 하는 신문사에서 지내다 밖으로 나가면, 어느새 텅 비고 풀어질 대로 풀어지는 자기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오랜만에 과 활동을 하면서 아무런 압박도 없고, 아무런 제약도 없는 곳에서 자유분방함 대신 방만함을 느꼈다. 그리고 방학 동안 할 일이 없어서 괴로워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오히려 즐거움이다.

조금 전에 열심히 쓴 기사가 하나 잘려나갔다. 비난도 많이 들었고, 혼도 많이 났다. 그런데 즐겁다. 한 주 내내 돌아다니며 취재하고 컴퓨터 앞에서 계속 글을 써왔던 것이 쓸모없어졌는데 기분이 좋다. 나 스스로가 이미 어설픈 것은 인정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까.

신문기사엔 절반이 필요없다. 내게도 절반은 필요없다. 완전하지 않으면 폐기처분되는 기사처럼, 나도 이곳에서 어느새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하나의 기자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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