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부문 가작] 프로메테우스
[2017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부문 가작] 프로메테우스
  • 박동준<인문대 영어영문학과 15> 군
  • 승인 2017.12.03
  • 호수 1469
  • 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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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눈은 눈꺼풀 속의 세상을 본다.

그 세상 속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비춰지고 있는 모습,

나를 등지고 있는 그 모습을 알아보는 것이 두려워 잠들지 못하는 때가 있다.

혹여나 눈이 마주치게 될까봐, 그 모든 것을 못 본 척 할 수 없게 될까봐.

가늘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텅 빈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때가 있다.

침묵 속에서 끝없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그런 때가 있다.
 

9월 27일

정오를 살짝 넘긴 시간, 회색빛의 구름 떼 사이로 잠깐 고개를 내민 태양의 따가운 시선에 눈을 뜬다. 하루는 벌써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을 향해 가고 있다. 어릴 적엔 이맘때쯤이면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유난히 극심한 올해의 찌는 듯한 늦더위와 축축한 공기에 온 몸이 짓눌리고 있는 기분이다. 이런 날씨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

20대 초반, 부모님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형제자매나 연락이 닿는 친척도 없다. 지금으로서는 하고 있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어 말하자면 백수이다. 누군가가 ‘요즘 어떻게 지내니?’ 따위의 의미 없는 말을 건네 왔을 때 얼버무릴 대답을 생각해본 것도 오래전 일이다.

막노동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게 대부분이었던 일상엔 크게 기억에 남는 일이 없어 특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시간은 순식간에 나보다 몇 년을 앞서 나갔다. 다른 집들보다 햇빛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어느 골목 구석 반지하 단칸방에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오늘도 벌써….”

혼자 탄식하듯이 허공에 한마디 내뱉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이렇게 뭔가를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최근 몇 개월간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동이 트기 시작할 때쯤에야 간신히 눈을 붙여 정오가 다 되어서야 눈을 뜨는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늦게까지 깨어있다고 해서 딱히 무언가 쓸모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침상 위에 누워서 매일 하는 생각을 또다시 되풀이할 뿐이다. 의식적으로 뭔가를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불 꺼진 방의 허공을 조용히 응시하다보면 어느덧 머릿속에서 대화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무슨 말들이 오고 가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른 생각을 피하기 위해 그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일 뿐이다. 다음날 해가 뜨면 말소리는 잦아들고 가벼운 두통과 무기력감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가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시 하루 동안 무엇을 했나 되짚어 볼 때면 생각나는 것이 없어서 금방 그만두곤 한다. 언젠가 문득 이런 식으로 하루를 흘려보내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워서 하기 시작한 일이 일기를 쓰는 것이다. 아무리 무미건조한 하루라도 기록을 남긴다면 무언가 의미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소망. 불을 끄기 전 잠시 의자에 걸터앉아 어딘가에 놓여있던 펜을 쥐어 잡고 작은 수첩을 펼쳐 짧은 글을 써내려간다.

“9월 27일, 날씨는 약간 흐림. 오늘도 하루 종일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시간은 매순간 끊임없이 흐른다. 더 이상 비관적인 생각들에 빠져 허송세월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나도 큰 빚을 졌다.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더 이상 이렇게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내일 하루부터 시작하자. 내일 하루만큼은 최선을 다해 살자. 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서 일 년이 된다. 처음부터 너무 거창한 목표를 세울 필요는 없다. 우선 단 하루만큼이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자.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9월 28일

벌써 날이 저물어간다. 저녁을 인스턴트식품으로 대충 때우고 난 뒤 내가 하는 일은 아무데나 드러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스마트폰 화면 위에 떠오르는 나와 별 상관없는 뉴스들과 거기에 달린 사람들의 댓글 따위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보면 어느덧 창밖은 완전히 어둠속에 잠긴다.

초점 없는 두 눈이 갈 곳을 찾아 떠돌다가 우연히 스마트폰 화면 위쪽에 작게 표시 되어있는 시간을 발견하게 된 것은 오후 11시 반 쯤의 일이었다.

“또다시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또다시 이런 식으로…….”

문득 가슴속이 꽉 막힌 듯이 답답한 기분이 들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가서 닫혀있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오래된 탓에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어딘가에 끼여 완전히 열리지 않는 창문 밖의 풍경에는 또 다른 집들의 창문들만이 가득했다. 사방이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는 이 골목에 열려있는 창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창문이라는 것이 열려있지 않다면 벽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상념에 빠진 것도 잠시, 다시 한 번 모든 생각과 행동을 멈추게 만드는 무기력감에 휩싸여 삐걱대는 창문을 힘주어 닫고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떠오른다. 그 일만이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는 며칠 지나지도 않아 내 기억 속에서 먼지처럼 흩어져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을 그만두길 원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간신히 의자에 몸을 걸친다.

“9월 28일, 날씨는 흐림. 나는 지금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흘려보내온 무상한 세월들과 그 과오들은 모두 잊어버리자.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나를 옥죄는 모든 사사로운 것들을 떨쳐내 버리고 다시 한 번 일어서자. 내게도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 두 번의 실패는 나를 좌절시키지 못한다. 더 이상은 지금까지와 같은 나태한 생활을 용납할 수 없다. 더 이상은 도망치고 싶지 않다. 지금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결단, 의지, 용기….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다. 실패와 좌절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오늘의 나는 실패하였더라도 내일의 나는 다를 것이다. 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일 단 하루만 최선을 다해보자. 내가 계속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내일 하루만 후회하지 말아보자.”
 

10월 25일

시간은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아서 잠시만이라도 그 궤적을 눈으로 쫓지 않고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느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활시위는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당겨졌다. 날아가는 화살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날아가고 있는 속도를 낮출 수도 없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날아가는 화살을 끊임없이 눈으로 쫓으며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다.

나아가고 있는 방향. 인생이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과정에 불과하다. 화살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인생의 완성은 죽음이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어차피 결국엔 다 죽으니 상관없다’와 같은 소리를 떠벌리고 다니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올림픽 양궁게임에서 과녁의 정중앙에 정확히 꽂힌 화살과 목표물을 놓치고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돌다가 힘이 빠져 바닥에 가라앉은 화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거기에 더해 애초에 정확한 목표도 없이 쏘아올린 화살은 또 어떠한가.

내가 쏘아올린 화살이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방금 내가 깨달은 것은 이번에는 내가 거의 한 달 동안이나 정신을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화살은 한 달 전과는 완전히 다른 공허 속에서 목적지 없는 방황을 계속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 실패의 좌절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다짐과 커다란 결심을 가볍게 내뱉고 다음날부터는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무의미한 일로 시간을 흘려보내며 의도된 망각 속에서 안식을 찾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와 같은 진부한 의문을 던지면서도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고 들지는 않는다.

작년 이 맘 때쯤 수년간 준비해왔었던 시험에 두 번째로 낙방했었다. 내가 무기력감과 좌절감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 첫 번째 실패를 겪었던 때는 생각보다 무덤덤했었던 것 같다. 그때 첫 번째 실패를 마주한 나를 무너지지 않게 받쳐준 것이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는지, 아니면 ‘한 번만 더하면 될 것 같다’와 같은 막연한 희망 또는 기대였는지는 확실치 못하지만, 내게 쏟아져 내린 두 번째 실패의 무게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지탱될 수가 없었다. 가혹한 현실을 마주함과 동시에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 여태까지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올해 다시 시험이 열리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지만 나는 올해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다른 할 일이 있어서 라던가 목표를 변경 했다던가 등의 납득할만한 이유는 없다. 그냥 할 수가 없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도에는 성공에 대한 열망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든다. 성공할 수 없더라도 실패만은 피하고 싶었다. 성공의 가능성을 모두 닫아버리게 되더라도 실패만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아직 나에겐 기회가 남아있다. 아직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다.’와 같은 헛된 망상에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첫 번째 판엔 가위, 두 번째 판엔 보를 내서 모두 졌다. 세 번째 경기는 할 생각이 없다. 주먹을 냈을 때조차도 져버린다면, 주먹을 낸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아직 주먹을 내지 않았을 뿐이라는 내 최후의 변론마저 부정당해 버린다면, 그 때 나를 찾아올 절망과 비참함을 나는 견뎌낼 자신이 없다.

나는 왜 이토록 초라해져야만 했을까,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문득 목이 메어와 불 꺼진 방안을 초조하게 맴돌던 발걸음을 멈췄다. 평소와 같았으면 이런 괴로운 생각 따위는 진작 그만두고 바닥에 드러누워 스마트폰 화면이나 쳐다보며 다시 값싼 편안함을 되찾았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벌어진 창문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반쯤 감긴 눈을 번쩍 뜨이게 해주어서는 아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홀로 떠있는 달이 왜인지 모르게 쓸쓸해 보여서도 아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당장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더 깊은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삶의 의미, 방향을 잃은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그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여와 이젠 더 이상 내 안에 담아둘 수없는 크기가 되어있었다. 밖으로 쏟아져 나온 업보의 화신들은 무자비하게 나를 채찍질 했고, 죄인은 채찍질보다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저지른 일의 가혹함을 견뎌낼 수 없어 눈물을 쏟아냈다.

어느새 다시 초조하게 방안을 맴돌고 있는 두 발을 가까스로 멈춰 세우고 억지로 잠자리에 든다. 무언가를 새롭게 다짐할 기분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거짓들로 나를 채우고 싶지 않다. 머리가 토해내려는 생각들을 억누르고 서서히 눈꺼풀로 두 눈을 덮는다. 항상 두려웠던 모습이 오늘은 너무도 서글프게 다가온다.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 멀고도 가까운 그 모습을 응시한다. 그 모습은…….
 

11월 19일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나 자신을 속여 왔다. 이 수첩에 쓰여 있는 지난 몇 년간의 기록은 그 대부분이 헛된 다짐과 망상을 다룬 것에 불과하다. 큰 좌절과 절망 앞에 무력했던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속여 왔는지 보여주는 위선과 자기기만의 기록.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하루를 보내고도 무언가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낸 듯이 기록을 남기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으며 다음날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또 똑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정당화 해왔다. 내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옛날의 내가 돌이킬 수없는 실패를 겪고 좌절 속에서 허우적대는 지금의 나로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멀리서 그런 내가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이 보일 때면 나는 언제나 비상구를 향해 도망쳤다. 모든 것을 잊고 그저 다 잘될 것이라는 위안과 언젠간 찾아올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만을 바라보며 지금 당장 고통 받고 있는 나의 모습은 온 힘을 다해 외면해왔다. 피할 수없는 것을 피하려했고, 도망쳐선 안 될 것에서 도망쳐왔다. 비겁자, 위선자,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거짓말로 세상의 시선을 피해 남몰래 도망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왔다. 죄책감을 억누르기 위해 생각 없이 거짓말을 써내려가며 스스로를 기만해왔다. 내가 이 수첩에 쌓아온 나의 업보는 이제 감당할 수 없는 크기가 되어 나는 더 이상 이 수첩의 다른 페이지들을 펼쳐볼 수조차도 없다. 나는 왜 이렇게 해야만 했었는가. 왜 내가 이렇게 망가질 때까지 넋 놓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는가.”

11월 20일

“나 스스로를 기만한 죗값은 커다랬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전부가 하나의 커다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주제를 모르고 꿈만 컸던 한 애송이의 망상처럼 느껴졌다.

고통을 외면한 죄는 공허감으로 처벌 받았다. 모든 것이 내가 자초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도 한심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릴 적 즐겨 읽었었던 그리스-로마의 신화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잊을 수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인간들에게 불을 전해준 죄로 평생 바위산에 묶여 매일 아침 독수리들에게 간을 뜯기는 형벌을 받게 된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 어린 나에게 그처럼 끔찍한 형벌, 그와 같은 고통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그 이야기를 지어낸 그리스인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큰 목적, 자신이 품은 뜻을 위해서는 이와 같은 큰 고통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불로 대변되는 지혜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고통 받아야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야기의 다른 부분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위대한 프로메테우스도 가끔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때가 있지 않았을까. 바위산에 온몸이 묶여 해가 떠있는 시간 내내 간이 뜯겨나가는 고통을 겪고, 밤이 되어 달이 뜨면 매서운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외로움과 가슴속에 사무치는 설움에 남몰래 몸서리치지는 않았을까. 다음날 다시 해가 뜨면 겪어야할 고통에 달이 저물지 않기를 기도하고, 마침내 아침이 되어 동이 트기 시작하면 도망칠 수없는 가혹한 현실에 탄식하지는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 누구도 들을 수없는 목소리로 서글프게 울부짖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또다시 떠올려본다. ‘그는 분명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속에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꺾을 수없는 의지가 버티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 감히 신들을 거스르고 영원한 고통마저도 감내할 수 있게 만들어 줄만큼 강한 신념. 자신의 마음이 빚어낸 화살이 향하고 있는 목적지에 대한 확신. 이 모든 것들로 인해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자신 앞에서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밤이 되어 눈을 감으면 보이는 자기 자신의 모습 앞에서 멋쩍게 웃으며 격려의 말을 건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고통 받을지언정 결코 도망치지는 않았다….’”
 

12월 31일

신년을 하루 앞둔 오늘. 거리는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기대로 왁자지껄 하다.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감출 수없는 즐거움이 가득 차있다.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거리를 활보하며 온 세상을 더 하얗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어린아이들,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지는 어느 집의 가장, 모두에게 오늘 하루는 특별하다.

새로운 시작. 365일 쉬지 않고 사람들을 몰아붙여온 시간이 일 년에 단 한번 잠시 숨을 돌리고 또 다른 경주의 시작을 축하할 여유를 갖는 날이다. 원래 난 그다지 이런 날을 축하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올해만큼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이 내게도 가볍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이미 나는 얼마 전 길었던 방황을 끝내고 내 나름대로의 신년을 시작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온갖 헛된 망상 속에만 갇혀있던 시절을 뒤로하고 출구를 찾아 내가 초래한 절망 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직 ‘요즘 뭐하고 지내니?’에 당당하게 내놓을만한 답변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닫혀있던 창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결코 그 과정이 수월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삐걱대는 불협화음을 내면서도 창문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창밖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에 몇 번 데인 일로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 작은 방안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던 내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말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긴 시간이었다. 세상 모든 동식물들의 붉게 상기된 양쪽 뺨 사이로 흩날리는 꽃잎들, 일렁이는 아지랑이의 물결 속에 작열하는 태양이나 홀로 걷고 있는 행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는 낙엽과 같은 것들을 계절이 몇 번씩이나 바뀌는 동안 한 번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도 없었다. 이젠 어느덧 온통 새하얘진 세상 속에서 나는 앞으로 이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질 수채화의 모습을 떠올린다.

사방에서 맑고 투명한 빛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 이 잠시 동안만의 설원 속에서도, 찾지 않으면 그 그림자조차도 잡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웅크린 채 침전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만이 채우고 있는 그 어느 어두컴컴한 공허 속에서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 가끔은 소리 내 울어도 좋다. 그만큼 괴로울 때는 그만큼 괴로워해도 좋다. 다만, 단 한 가지, 너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하지는 마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에게 가끔씩 손을 내밀어 주는 것만큼은 잊지 마라….’

비슷비슷한 높이의 건물들이 떼 지어 있는 주택가 한복판, 어느 한 건물의 옥상위에 올라서서 각자 다른 삶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이 드넓은 텃밭들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한참을 상념 속에 잠겨있었다. 온 세상이 새하얀 천막에 덮여 다시 푸르러질 날을 기다리며 잠시 숨죽이고 있는 이 때, 문득 가슴속이 울렁이며 나도 모르게 내뱉은 익숙한 한마디가 많은 것을 떠나보내는 송년회의 시작을 알렸다.

“12월 31일! 오늘은 세상이 온통 새하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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