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낙엽 가득한 정동 길에서 마주하는 ‘서울 속의 러시아’
마지막 낙엽 가득한 정동 길에서 마주하는 ‘서울 속의 러시아’
  • 기계형<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 승인 2012.11.18
  • 호수 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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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떠나가길 재촉하는 매콤한 바람이 분다. 떠나가는 것들은 아련한 감동을 주기 때문일까. 거리를 뒹구는 낙엽마저도 노랗고 붉은 빛깔이 더없이 곱고 그래서 더욱 처연하다. 아직 한 달 보름이나 남겨둔 2012년을 회고할 시기는 아니지만, 러시아역사를 전공하는 필자에게 올해는 ‘서울 속의 러시아’를 조명하게 해주는 ‘사건들’로 인해 덕수궁과 정동 길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사건들이란 3월에 장윤현 영화감독의 「가비」 상영, 11월 9일부터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특별기획전 「정동 1900」, 그리고 11월 16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1880-1989」 전시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롱숏으로 찍은 CG 영화스크린과 낡은 흑백사진 속에서 덕수궁 후원과 정동의 길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거리 곳곳은 구한 말 격동의 소용돌이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 가쁜 목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백 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건물들이 생겨나고 스러졌고 그 과정에서 덕수궁과 정동 길이 분리되었지만, 이곳에선 과거에 대한 현재적 기억이 매우 새롭게 변주되고 있는 셈이다. 공간은 단지 역사의 무대나 배경으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역사의 형성물, 나아가 역사의 능동적 행위자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아니, 공간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다. 

흑백의 사진들 속에 등장하는 공간들은 컬러영화 속의 배경들과 오버랩 되면서 흥미로운 효과를 일으킨다. 영화 「가비」는 말랑말랑한 사고를 하는 데다 맑은 눈을 지닌 소설가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 사랑보다 지독하다(2009)」를 원작으로 한다. 고종의 아관파천과 독살미수설을 역사적 배경으로, 그리고 러시아공관에 머물렀던 고종이 유달리 즐겼던 근대적 기호품 가비(커피)를 소재로 만든 이 영화는 순제작비 54억을 들인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최종흥행 27만 명에 그친 ‘실패한 영화’일뿐만 아니라 과도한 ‘역사왜곡’으로 비난받았다. 그러나 흥행은 논외의 문제이며, 더욱이 영화란 허구를 전제로 한 감독의 상상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사실의 왜곡’을 거론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흑백사진들 뒤의 배경들, 감독이 단지 영화 스크린 속의 배경으로만 설정한 공간 그 자체가 일으키는 ‘역사적 상상력’의 역동적 힘이 매우 인상적이다. 러시아인 건축기술가 사바찐이 설계한 러시아공사관의 옛 건물들, 덕수궁 후원에 그가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한 중명전과 정관헌 등의 건물들, 1896년 2월 11일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친러세력의 협조로 단행된 아관파천의 공간들, 그해 5월 26일의 러시아제국 니콜라이2세 황제대관식에 맞춰 3월에 길을 떠났던 민영환과 사절단 일행이 배회했을 법한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넵스키 거리, 베베르공사와 그의 처형인 미스 손탁의 대화 장소, 그리고 덕수궁 후원의 사바찐이 등을 보면서 우리는 그날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역사적 공간은 현재의 우리가 그것을 다시 불러내고 말을 건넬 때 화답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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