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과 카페의 틀린 그림 찾기
다방과 카페의 틀린 그림 찾기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1.12.30
  • 호수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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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문화 예술의 장이었던 '다방'풍속도
▲ <'제비다방'에서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작가>
과거의 다방 역시 지금의 카페와 같이 문화 공간으로 존재했을까. 1900년대 초·중반의 다방은 현재 카페의 ‘문화 소비 공간’을 넘어 고차원적인 ‘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장’이었다. 특히 명동 일대는 다방의 군립지로, 문화예술 커뮤니티의 대표 장소로서 역할을 했다.

1900년대 초·중반에는 문화예술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마음껏 사회에 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당시 다방은 문화예술인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며 창작 욕구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방은 그들의 작업실이기도 했다.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다 보니 다방은 자연스레 미술 전시회, 문인의 밤, 출판기념회 등 문화 행사의 장소로도 이용됐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다방이기도 했던 ‘낙랑팔러’는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정인택, 이상, 박태원 등의 문인들이 이곳에 머물며 교류하고 문인들끼리의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낙랑팔러’를 기점으로 서울 곳곳에 다방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문인들은 다방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는 등 다방에 많은 애착을 가졌다. 소설가 모윤숙이 운영했던 ‘문예싸롱’ 역시 다방을 작업실 삼아 글을 쓰던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다방을 통해 원고 청탁과 연재 교섭 등이 이뤄지기도 했다. ‘문예싸롱’의 바로 위층에 최초의 순문학잡지 ‘문예’의 편집실이 있어 이를 통해 등단한 문인들을 만나려는 기자들이 많이 출입하기도 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상 역시 ‘제비다방’, ‘쯔루’, ‘무기’ 등 여러 다방을 운영했었다.

당시 명동의 국립극장 인근의 다방에서는 배우들과 감독들이 즉석 캐스팅을 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국립극단 단원들이 자주 찾았던 다방 ‘은하수’는 매니지먼트 사무실을 대체할 정도였다. 연예 관계자들이 그곳에 즐비해 있었으며, 계약도 ‘은하수’ 다방에서 이뤄졌다.

1900년대 다방에는 클래식 음악도 유행했다. 클래식 음악을 틀던 다방은 서양 문화에 대해 호기심을 지닌 문화예술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당시 레코드판과 축음기는 부유층만의 전유물이었기에 쉽게 접할 수 없는 문화였다. 가난했던 예술인들은 다방에서나마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현대의 카페에서는 개인의 문화가 소비되지만, 과거의 다방은 예술인들이 문화를 창조하며 교류하는 공간이었다. 끼리끼리 혹은 홀로 가기에 낯선 이와의 교류는 드문 현대의 카페와 사람들 간의 직접적인 소통이 존재하던 아날로그적인 ‘다방’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참고: 논문 「1900년대 초·중반 명동지역 다방의 변천과 역할에 관한 연구 : 문화예술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다방」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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