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의 남자였다
나는 왕의 남자였다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11.26
  • 호수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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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과 고종의 환관 유재현
▲ SBS 드라마 「왕과 나」에 등장하는 환관들
“환관 유재현을 잡아들이라.”

갑신년 겨울, 개화파 서재필의 서슬 퍼런 명령에 내 양팔이 붙들렸다. 정변이 일어난 지 하루만의 일이다.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무리는 지난 1876년 개항 이후 세력을 키워가기 시작한 이들이었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의 개화사상이 그 시작이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조선책략」이란 도서를 들여와 개화사상에 힘을 실어준 것도 한몫했다. 이번 정변을 일으킨 이들은 특히 개화파 내에서도 급진적이었던 김옥균 등의 급진파였는데 이들이 원한 것은 지금보다 더 확실한 전면적 개혁이었다.

개화파 무리는 우정국 개국 축하연이 열리던 날 밤 거사를 진행했다. 우정국은 조선이 영국, 일본 등과 우편물교환협정을 맺고 근대적인 우편업무를 시작하고자 한 곳이었다. 축하연이 열리던 날 밤 이들은 우정국을 습격해 중전마마의 측근들을 포함한 급진개화 반대 세력들을 처단했다. 그리고서는 자신들의 행동이 아닌 것처럼 주상전하를 속이고자 했다.

사실 내가 처음부터 이들의 반대편에 서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이 곧 내놓을 14개의 개혁안은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다. 조선은 왕의 나라다. 왕의 명령에 따라 나라의 모든 영역들이 통치되는 것이다. 이들이 왕의 권한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이 행태를 두고 봤어야만 옳은 것인가.

사실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이미 시행되고 있던 개화정책에 의해 환관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이 상태에서 더욱 환관을 줄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측근인 우리들은 이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이들은 정변을 일으키기 10여 년 전부터 이미 우리 환관, 궁녀들을 포함한 전하의 최측근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고자 했다. 궁녀 고대수 등은 이들의 편에 넘어가 정보를 제공하거나 실제 거사에서 이들에게 궁궐 문을 열어주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정변에 대해 다른 궁인들과 조금 다른 태도를 취했다. 때는 지난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변을 준비하던 이들은 한양에 군사력이 집중돼야 한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때마침 이들과 뜻을 같이 했던 윤웅렬은 함경남도에서 ‘북청군대’를 양성, 관리하고 있었는데, 개화파들은 이를 서울로 끌어들인 후 정변 시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전마마의 민씨 일가 등은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나는 민씨 일가의 뜻에 수긍하고 동참했다. 전하께 “지방의 군심(軍心)은 예측하기 어렵고 또 윤웅렬과 윤치호가 내부적으로 몰래 이야기를 통한다면 일이 매우 염려된다”며 이들이 전하께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전한 것이다. 전하께서 내게 설득 당해 북청군대의 철수를 명한 것은 물론이다.

이런 행동이 이들에게 밉보인 것은 당연한 결과다. 나는 결국 이런 식으로 개화파의 기대를 저버렸다. 거사가 일어난 후 주상전하를 눈속임하려는 이들은 일본 대사관에 전하의 친서를 전달하려는 나를 문 앞에서 막았다. 일본군과 짜고 정변을 일으킨 이들에게 내 행보는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하께 “문을 통행할 수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고 이를 들은 중전마마께서는 김옥균을 의심하기 시작하셨다. 이들은 그 이유를 대충 다른 이에게 떠넘기고 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지금 개화파의 날 선 눈빛을 받고있는 내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나는 환관으로서 주상전하와 중전마마께 각별한 총애를 얻고 있다. 이미 우리 환관들은 필요하다면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교육받아 왔다. 전하를 보필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내 임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착오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당연히 개화파의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서재필의 명령에 죽음 앞에 선 지금도 무슨 후회가 있으랴. 그렇다. 참으로 왕을 위한 삶이었다.

참고: 논문 「갑신정변과 궁중 내부 세력의 내응과 반발-특히 내시 유재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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