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뒷골목 풍경」, 인식의 삼각형을 넘어
「조선의 뒷골목 풍경」, 인식의 삼각형을 넘어
  • 강명관
  • 승인 2011.09.20
  • 호수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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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내가 쓴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하 「뒷골목풍경」)은 대중을 위해 가벼운 문체로 쓰여졌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랐다. 나는 원래 국문학과 한문학을 공부했다. 학부와 석사과정 동안 이상하게도 국문학 작품의 미적 성격을 논하는 논문에 별다른 흥미와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땐 국문소설과 판소리, 시조 등이 국문학계의 주 연구대상이었는데, 기왕의 논문들은 이런 장르의 미적 성격과 의식에 대해 긍정적인 언사를 늘어놓았지만 나는 찬동할 수 없었다. 예컨대 「춘향전」은 민중의 저항정신과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준 위대한 작품이라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판타지일 뿐이었다. 춘향은 오직 한 남자에게 성적으로 종속됨으로써 구원됐다.  「춘향전」은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될 것을 요구하는 열녀담론을 역설하고 있었고 그것은 여성과 상민의 담론이 아니다. 나는 국문학 연구사의 연구결과나 시각을 수용할 수 없었다.

정전의 지위에 오른 정설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관심은 그것들의 정설 여부보다는 그 정설을 생산하는 인식틀에 있었다. 인식틀이 동일하다면 그 위에 아무리 많은 주장이 각립하고 있어도 사실상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춘향(민중)의 저항이 조선의 중세 체제를 비판한다는 점, 이 작품이 남녀간의 애정을 허락하지 않던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사랑을 다루고 있는 점은 기정사실화 돼있다. 여기엔 비판적 사고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 인식틀이란 셋으로 보인다. ‘민족’과 ‘근대’와 ‘민중’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인식틀은 역사를 해석하는 근원적 지평이다. 이는 교육과정, 각종 매체 등을 통해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이 사유방식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자동화한다. 예컨대 광개토대왕이나 이순신, 세종대왕이라는 어휘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셋 중에 ‘민족’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 인물들에 관련된 자료에서 민족주의 서사를 자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이순신 이야기는 영웅서사시이며 그것은 ‘민족사’라는 영웅서사시와 동일하다. 고귀한 혈통의 민족은 위대한 삶을 누리다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를 맞이하지만, 탁월함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위대해진다. 이 민족사의 서사를 임진왜란을 위기로 설정하여 대입하고, 또 이순신의 백의종군에 대입하면 정확히 일치한다. 이 서사는 ‘민족’을 주어로 하는 서사에서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 서사가 ‘근대’와 만나면 내재적 발전론이 된다. 민족주의 서사는 위대한 민족을 입증하는 것인데 위대한 민족이 스스로 근대화의 길을 걸어간 것 역시 민족주의 서사다. 이는 선택적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반드시 입증된다. 내재적 발전론은 사실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깝다. 내재적 발전론의 정당성을 위해 이런 전제들이 필요하다. ‘조선전기는 중세, 조선후기는 근대’,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조선전기는 성리학, 조선후기는 실학’이라는 등식도 성립하며 모든 이분법적 담론들이 여기서 흘러나왔다.

마지막은 ‘민중’이다. 이 단어에 서려있는 평등이라는 아우라를 믿는다. 하지만 민중의 삶과 의식의 구체성을 벗어나거나 무시하는 민중론은 믿지 않는다. 예컨대 국문소설은 민중이 즐겨 읽었기에 진보적이라고 강변하는 태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찾으려 하는 민중은 그야말로 ‘상상된 민중’이다.

우리는 ‘우리 민족은 위대하다’,‘우리 민족은 발전해 왔다’, ‘민중은 승리하리라’라는 세 문장을 무한히 반복한 역사를 믿어왔다. 이 서사는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제한한다. 이것들은 서로 비판하고 보완하는 관계다. 만약 ‘이순신 서사’에서 영웅주의를 비판할 경우 반드시 대안으로 ‘민중’을 내세우게 돼있다. 우리는 민족과 근대, 민중이란 인식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인식의 삼각형을 비판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상상력은 발생할 수 없다. 한 점을 지나는 선분이 무수하듯 하나의 자료, 하나의 사건을 해석하는 방법은 무한하다. 이 무한한 맥락을 상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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