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하고 학교도 변한다
세상은 변하고 학교도 변한다
  • 기획보도부
  • 승인 2011.05.14
  • 호수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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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에 최루탄이 웬말인가


‘반미, 반독재, 민주화.’ 1980년대 대학가의 키워드다. 대학캠퍼스가 최루탄 연기에 뒤덮이는 일이 비일비재한 시절이었다. 학교 안에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시위에 대비한 전경들이 포진해있었고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은 전경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플래카드를 찢어 얼굴을 가리거나 가발과 수염으로 분장했다. 유신체제에 이어 등장한 군부독재체제에 대항하는 수업ㆍ시험거부의 집단 활동도 잦았다. 독재정권과 억압적인 정치구조에 반발해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한 열망으로 대학생 사이에서 민주화 운동이 퍼져나갔다.

반면 2011년 현재 우리 캠퍼스에는 ‘교육환경개선금 확충, 등록금 동결’이 화두다. 민주화를 외치던 1970~80년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지난 3일 서울캠퍼스 공대 학생총회가 계획돼 있었다. 공대 학생들이 논의하려던 안건은 등록금과 공대의 공간ㆍ시설, 복지문제였다. 하지만 총 인원의 10분의 1이라는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학생총회가 무산됐다. 미처 성사되지 못한 학생총회에 참석했던 공대 학생들은 노란 풍선을 들고 각 학과의 깃발을 흔들었다.

30년 사이에 한양대의 캠퍼스 모습은 큰 차이를 보였다.

민주화를 외치던 학생들은 교육ㆍ복지로 초점을 바꿨다.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독재체제 1970~80년대 당시 등록금이나 복지와 시설문제에 대한 요구는 교내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대외적인 이슈들만이 학생들에게 와 닿았을 뿐이다. 교내 문제에 대해서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모습이 엿보인다.

또 전경들이 학교에 대치하고 있고 최루탄이나 화염병이 날아다니던 과거의 광경은 현재는 상상할 수도 없다. 최근 ‘본관점거’ 같은 시위가 가끔 일어나긴 하지만 최루탄 연기에 학교가 뒤덮였던 것이 놀랄 일이 아니었던 과거를 생각해보면 시위 형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참여율 또한 큰 차이를 보인다.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1970~80년대 당시에는 시위를 하지 않던 학생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선ㆍ후배 사이의 친밀감이 높으면서도 엄격했기 때문에 후배들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집단의식이 만연해있었기 때문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시위현장에서 흔했다. 하지만 최근 대학캠퍼스 내에서 대표자들이 모여 회의하는 전체학생대표자회의나 최고의결기구라고 일컬어지는 학생총회는 참여 부족으로 무산되기 일쑤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학생들의 요구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개인화됐다. 학생총회가 성사된다는 자체에 큰 의의를 가지게 된 오늘날의 대학가. 스펙 쌓기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현 시대의 대학생들은 막걸리 한잔과 함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토로하던 그 시절이 궁금해진다.          

장보람 기자 jbr0209@hanyang.ac.kr
사진제공 : 한대신문사 44기 강성오 동인


고민없는 수업선택에서 스릴만점 수강신청으로

전쟁터로 떠나듯 PC방으로 향하는 수강신청 날 우리의 모습은 시대의 변화가 만든 새로운 풍속이다. 11학번들이 캠퍼스를 누비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 80학번들은 종이에 자신의 시간표를 적어내는 방식으로 수업을 신청했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지금과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의 수가 제한적이었고 학생들의 수도 적었기 때문에 분반이라는 개념도 거의 정립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인기강좌에 대한 경쟁도 전무했다. 선택할 수 있는 전공과목이 거의 정해져있기에 대부분 짜여진 시간표를 그대로 따라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종이를 제출하는 방식의 수강신청은 98년도 1학기, 웹브라우저를 이용하거나 학사정보시스템을 컴퓨터에 설치해 이용하는 방식으로 전환된다.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에 일부 문제가 있었지만 수강신청은 변화하는 현실에 발맞춰나갔다.

93년도에는 PC통신 ‘천리안’이 우리학교 특차합격자 명단을 첫 서비스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합격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해당 학교를 찾아가거나 ARS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놀랍다. 하지만 한편으론 원 클릭으로 합격과 불합격이 통지되는 시대보다는 합격의 감격을 더 느낄 수 있지 않았나한다.


세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교양들

시대를 반영하는 과목은 새로이 개설되고 시대를 쫓지 못한 과목은 폐강되는 과정을 거치며 교양과목도 발전해왔다.

과거엔 교양과목 또한 지금처럼 선택의 폭이 크지 않았다. 1989-1992교육과정에서는 지금의 외국어영역, 과학과기술영역과 같은 세분화 개념없이 '교양선택'이라는 하나의 분야로 구분됐다. 외국어 교양을 들어야 한다면 독일어와 불어1,일어2 등 해당 언어 중 수강을 원하는 과목을 택하면 됐다.

교양과목들은 4년 단위로 변화하는 교육과정 중 1993-1996시기에 영역별 세분화로 나아가 1영역부터 9영역까지의 분야별 교양과목이 개설된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9영역 건강ㆍ체육ㆍ무용 영역에 전문성을 요하는 스포츠수업이 개설되기엔 이른 감이 있었다. 1997-2000교육과정부터 학생들의 다양해진 욕구와 이로 인한 취미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다양한 스포츠 수업도 교양과목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골프,볼링,수영,스키,사교무용 등의 수업이 개설됐다. 이후로도 스노보드(1997-2000시작), 필라테스(2005-2008) 등 시대가 추구하는 스포츠수업들이 다양히게 개설됐다. 이들은 현재 수강신청 시작과 동시에 마감되는 인기강좌다. 개방적인 성문화가 대학생들에게 유입되면서 성과 관련한 교양(1997-2000, 성과문화)이 생겨났다. 그 변화를 이어간 현재 우리학교의 인기교양강좌 '성의이해'도 딱딱한 이론 수업이 아닌 성에 대해 교수와의 소통을 중시하는 수업의 대표적 예다. 이외에 취업이 사회의 문제로 떠오르면서 취업에서의 경쟁력을 배우는 교양도 생겼다. 시대가 요구하는 분위기를 반영했지만 못내 아쉬운 新(신)교양 풍속이다.                             

우지은 기자 7thheaven@hanyang.ac.kr

변화하는 대학생 따라잡는 총학

대학생들이 변한다. 2010년대를 살아나가는 우리들은 과거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등록금ㆍ취업ㆍ외국어 능력과 같이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개인의 능력, 일명 ‘스펙’을 중요시한다. 그럼 군사독재정권에 시달리던 80년대의 대학생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 등 정치적인 고민이 많았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90년대는 운동권과 비운동권 학생들이 대립하는 과도기였고 2000년대에는 비운동권이 우세해 정치에 대한 대학생의 관심은 전보다 줄었다.

우리학교 총학생회도 이런 흐름과 역사를 함께한다. 1960년 초대 학생회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1973년에는 초대 총학생회가 구성돼 학생 자치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절 학생회장이 되기 위한 일부 후보자들은 막걸리ㆍ커피 공세로 선거의 본질을 흐리기도 했다.

그 후 1975년부터 1985년까지는 국가 개입으로 총학생회가 없어지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회를 없애고 학도호국단을 조직해 각 학과를 군부대의 중대처럼 편성했다. 총학생회장 대신 학도호국단의 총학생장 선거가 진행됐고 모든 학생들의 자치활동이 학도호국단의 감시 대상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1985년 총학생회 선거가 부활하고 이에 운동권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80년대 후반의 우리학교 총학생회장 후보는 민족해방과 조국통일,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ㆍ처벌 요구 등을 주요 공약 사항으로 내세웠다.

90년대는 독재가 종식되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대립했다. 이에 후보자들의 여러 가지 이념 성향이 총학생회장 선거 표심이 움직이는데 중요한 요소가 됐다.

한편 선거 공약도 서서히 학생 문화와 복지 문제로 전환됐다. 1995년 총학생회장 선거 후보 공약 중 과학생회 강화와 대동제 개선, 사범대 도서관 건립 등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어 서울캠퍼스에서는 2002년 이후 지금까지 2년을 제외하고 모두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이 당선됐다.

최근엔 학생회 조직이 확대되고 전문화되면서 세부적인 공약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등록금 문제가 전 사회적으로 대두되면서 이와 관련한 공약이 중심이 되고 있으며 학사ㆍ복지ㆍ문화ㆍ환경ㆍ홍보ㆍ커뮤니케이션 부분에서 광범위하게 공약을 내고 있다. 다양한 학생들의 각기 다른 생각을 모두 수용하려는 총학생회의 노력이다.

윤준혁 기자 jobsyoon@hanyang.ac.kr


그래도 세상은 변한다

우리에게 ‘카톡’이 있다면 그 시대 대학생들에겐 ‘삐삐’가 있었다. 삐삐가 비교적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인 편인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제품이라는 한 광고의 카피가 지금의 ‘신세대’들과 비교되며 흥미롭게 느껴진다.

PC통신의 등장은 대학생들을 동호회로 묶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 한 설문조사 결과 나우누리, 유니텔, 천리안, 하이텔 등 추억이 묻어나는 PC통신의 이용자 절반이 대학생이었을 정도다. PC통신은 전화선을 이용했기에 매우 느렸을 뿐 아니라 전화비도 어마어마했다.

웹상에 대학생들을 위한 사이트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이었다. 99년에는 우리학교 대학원을 다니던 재학생이 대학생을 위한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사이트에서는 수업에 대한 평가와 단체 미팅을 주선하는 등 현재 우리학교 자유게시판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들이 게시됐다. 학보사와 연계해 상세한 대학소식을 전달하려 한 향후 계획은 구성원 간의 정보공유를 위한 다양한 시도로 보인다.

대학 내 게시판과 도로, 나무에 부착된 벽보와 안내문들도 학내 학생들의 의사소통수단이었다. 대학생활정보를 담은 벽보들은 학교 당국의 사전 검열 절차가 없어지자 이용률이 크게 늘어났다. 당시엔 겹겹이 붙어 있는 안내문이 유일한 정보이자 학생들의 유일한 소통 도구였다.                                                                               

우지은 기자
사진제공: 동아일보(1994년 3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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