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위한 공간 노들과 노들의 고시생들
떠나기 위한 공간 노들과 노들의 고시생들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0.10.03
  • 호수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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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의 학원가 거리에서 수험생 마음속까지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역을 나서면 동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육교가 있다. 그 육교 위에 서서 노량진을 둘러보면 유난히 많은 학원가가 눈에 띈다. 수산시장으로도 유명하지만 ‘학원’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지역 중 하나일 정도로 수많은 학원들이 밀집해있는 고시촌 노량진. 모두가 한결같은 바람으로 시작하고 머무르는, 그러나 떠남만큼은 한결같을 수 없는 노들(노량진의 옛지명), 노량진의 오늘이다.

강변의 마을에서 학원가 동네로
작가 김진송 씨는 저서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를 통해 화자의 어린 시절 고향인 노량진을 추억하며 “철도가 없었다면 생기지도 않았을 동네”라고 말한다. 그만큼 철도의 발달은 노량진의 형성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최재헌<건국대ㆍ지리학과> 교수는 “노량진역은 제물포역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역”이라며 “그렇기에 일찍부터 교통이 편리했고 역 주변의 지가도 상대적으로 저렴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었다”고 전했다.

노량진의 특성은 철도역만이 아니다. 노량진은 강 너머에 여의도가 보이는 강변에 위치해 있다. 논문 「도심 속 역사 기능의 재발견」에 따르면 노량진은 예로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해 노들나루라 불렸으며 백로가 노닐어 노량진이라 명명됐다. 다음은 김 작가의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중에 있는 내용이다.

『강에는 흐르는 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백사장이 있었으며 고운 모래흙이 덮인 둔치가 있었으며 둔치를 올라타고 강둑이 뻗어있었다. …(중략)… 강이 없었다면 홍수에 떠내려 오는 세간도 건져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강이 없었다면 나는 그렇게 긴 하루를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랬던 노량진에 학원가가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8만 명의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노량진 역 일대의 특징은 여타 역 주변처럼 출ㆍ퇴근 시간에만 사람이 몰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원문화가 집중돼 유동인구 중 70% 이상이 학원 수강생들이다.

노량진은 도시 지리학적으로 집적 이익의 이점을 가진다. 학원이 모여 있어 강사와의 접촉이 쉬우며 수강 학생의 입장에서도 비교적 빠르고 쉽게 맞지 않는 강사를 떠나 다른 강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초기의 입지우위성으로 인해 이런 집적 효과가 발생하고 지역의 특색이 유지되는 지리적 관성 또는 입지적 관성으로 인해 노량진의 학원가는 흥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최 교수는 “철도로 인한 편리한 접근성과 낮은 지가 외에도 1970년대 서울대학교의 관악구 이전으로 인해 동작구와 노량진역이 그들이 쉽게 찾는 장소가 됐다”고 설명했다.

거리 곳곳에 고시촌 느낌이 물씬
노들 거리를 걸어 다니는 학생들의 각양각색 표정들처럼 그들이 준비하는 시험들도 가지각색이다. 행정고시, 임용고시, 대입수능시험, 편입 등 학원들이 내놓는 광고판에서 그 다양함이 묻어난다. 경찰 학원을 운영하는 김대원<서울시ㆍ동작구 34> 씨는 “역 근처라 그런지 몰라도 시험 변화 동향을 빠르게 알 수 있다”며 “경찰 학원 역시 서울 어느 지역보다도 노량진에서 제일 잘 된다”고 전했다.

집을 떠나 노량진으로 오는 수많은 고시생들에게 끼니 해결은 매우 민감한 현안이다. 이들을 겨냥해 만들어진 노량진 일대의 식사거리나 학생들의 간식은 매우 저렴한 가격을 자랑한다. 학원과 독서실, 학사 등의 주변에는 ‘고시식당’도 있다. 대로변에 있는 한 독서실 문 앞에도 식권을 판매한다는 내용의 안내서가 보인다. 독서실 측에서는 “1장에 10식인 식권을 28000원에 판다”며 “우리 독서실의 경우 식당과 제휴했는데 이는 노량진의 여러 독서실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음식점과 더불어 노점에서 판매하는 갖가지 메뉴들도 지나가는 이들의 이목을 끌만하다. 김치만두 4개에 1000원, 비빔밥 1800원, 카레라이스 1500원 등 다른 동네 노점에서는 찾기 힘든 메뉴와 가격이다. 이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와플과 토스트도 먹을 수 있다.

서점도 고시생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 ‘에이포서점’의 김재정<서울시ㆍ동작구 26> 씨는 “책을 사가는 수험생들의 나이대가 천차만별”이라며 “온갖 종류의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위해 대부분의 수험서적을 할인한다”고 말했다. 김 씨의 말처럼 인근의 거의 모든 서점들이 공무원 수험서, 수능 모의고사 문제지 등의 수험 서적을 할인한다고 광고하고 있었다.

노들 고시생들의 생활 속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노들을 택한 고시생들에겐 저마다의 고충이 있다.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 온지 10개월째라는 오혜림<서울시ㆍ동작구 23> 씨는 “공무원 시험을 보는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노량진에서 준비한다”며 “젊은이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어쩐지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것이 노량진의 특징”이라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두운 분위기에 대해 오 씨는 “시험 자체도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전혀 예측이 안된다는 게 가장 막막한 것 아니겠냐”고 차분히 말했다. 노량진 생활 11개월 째인 김진주<서울시ㆍ동작구 27> 씨도 “생활하는 데에 그리 불편한 점은 없지만 엄마가 해주는 집 밥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혼자 살며 공부 시간을 쪼개 살림살이를 챙긴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 씨와 함께 앉아있던 이들 중 조용탁<서울시ㆍ동작구 29> 씨는 공무원 시험 합격생으로 잠시 이곳에 놀러왔다며 자신의 합격에 대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조 씨는 “나 또한 부모님 간섭 없이 지내 마음이 편했다”며 이에 덧붙여 “그렇지만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뭔가를 하려면 종종 줄을 서야하는 점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 씨는 “그래도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우리들끼리 맥주도 마시고 당구도 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행복한 시간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웃는 이도 있었고 우는 이도 있지만 이들의 꿈은 하나다.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라는 홍예지<서울시ㆍ동작구 29> 씨는 “노량진은 마치 나그네들의 집합소 같다”고 말했다. 홍 씨는 노들 고시촌을 “떠나기 위해서 머무르는 모순적인 곳”이라고 평했다. 

사진 심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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