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져가는 헌책방 속에 기억이 있다
기울어져가는 헌책방 속에 기억이 있다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0.09.11
  • 호수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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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발걸음을 기다리는 헌책방

헌책 속엔 그 책을 지나쳐간 사람들의 흔적이 있다. 헌책방을 통해 자신의 과거 대학시절을 회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헌책방을 이용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경제적인 이유는 물론 구하기 어려운 책을 운 좋게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성호<인문대ㆍ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대학생들에게 헌책방이란 여행이 아닐까싶다”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의외의 만남을 기대할 수 있는 점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헌책방들은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의 활성화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헌책방의 쇠퇴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것은 대학생이다. 권영균<공대ㆍ신소재공학과 09> 군은 “학교 근처에는 헌책방이 없는 것 같아 이용을 잘 안 한다”고 말했다. 김가영<연세대ㆍ토목환경공학과 07> 양 또한 “학교 주변의 헌책방의 가격이 다소 높다는 말을 들어 자주 방문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학생과 헌책방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위태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헌책방
초기 형태의 헌책방은 개화기부터 6ㆍ25 전쟁 직후까지의 기간 동안 형성됐다. 이때의 헌책방은 가게이기보단 노점의 형태로 운영됐다. 헌책방이 본격적으로 가게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시인 이규리 씨는 자신의 시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통해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풍경을 ‘버린 과거를 주워 누군가 차곡차곡 난전을 펴놓은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보수동은 전쟁 중 고물상에서 나오던 책을 되팔며 시작된 장사가 헌책방 골목으로 발전한 곳이다. 전쟁으로 인해 임시학교가 보수동 골목 주변에 많이 세워진 것도 헌책 판매 성행의 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곳 역시 상당수의 점포가 문을 닫아가고 있다.

서울 청계천 주위의 동대문 평화시장 부근에 있는 헌책방 거리와 인천의 배다리 골목 역시 대표적인 헌책방 명소다. 그러나 한때 헌책방 거리의 대명사로서 여겨졌던 이곳마저도 쇠퇴의 기운을 이겨내진 못했다.

이처럼 헌책방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인터넷 도서시장의 등장 △도시 계획 정책상의 변화 △대학 학내 서점의 확대 등이 있다. 인터넷 도서시장의 등장은 ‘원하는 책을 집에서 주문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무기로 헌책방을 비롯한 기존 오프라인 서점들을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다.

청계천 복원 공사, 인천 배다리 지하차도 공사 등과 같은 도시 행정 계획도 헌책방 문화를 크게 위축시켰다. 청계천 복원 공사는 동대문 헌책방 거리를 포함한 주변의 상권을 크게 위축시켰다. 인천의 배다리 지하차도 공사 역시 헌책방 골목 문화의 파괴 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각 학교에 교내서점이 확대됨에 따라 학생들이 전공 관련 서적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교내서점을 즐겨 찾게 된 것도 헌책방 쇠퇴를 부채질했다. 우리학교의 구내서점이나 연세대의 ‘슬기샘’ 등 교내서점은 학생들이 급하게 필요로 하는 서적을 제때 갖춰놓는다.

이에 따라 숙명여대의 ‘책천지’와 연세대의 ‘오늘의 책’을 비롯한 학교 앞 여러 헌책방들이 문을 닫았다. 이와 관련해 최연준<연세대ㆍ신소재공학과 10> 군은 “헌책방에 굳이 가서 책을 살 일이 별로 없다”며 “전공 관련 서적은 주로 교내 서점에서 사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내가 지켜온 헌책방과 기억
그러나 모든 헌책방이 위기를 맞은 것은 아니다. 서울대 앞 ‘책상은 책상이다’, 연세대 앞 ‘정은서점’, 경희대 앞 ‘책나라’ 등 일부 헌책방들은 오늘날까지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연세대 앞 ‘정은서점’의 정재은<서울시ㆍ서대문구 66> 씨는 1969년부터 헌책방을 운영해왔다. 정 씨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어린 학생들의 전과, 참고서나 대학생들의 교재가 주로 팔렸고 요즘에는 종류에 관계없이 다양한 책들이 골고루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 씨는 손님들에게 “경제 사정이 좋아지니 책이 흔해져서 함부로 책을 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정 씨에게는 헌책방을 운영하며 생긴 오래된 에피소드가 있다. 정년퇴임을 한 어떤 국문과 여교수가 사과 박스 채로 책을 기증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히 좋은 책들이었다는 것이다. 정 씨는 “이름도 몰라서 고맙단 말도 못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국외대 앞 ‘신고서점’ 역시 오랜 시간동안 헌책을 다뤄왔다. 아들에게 ‘신고서점’을 물려주고도 계속해서 가게를 돌보는 김해갑<서울시ㆍ동대문구 69> 씨는 “깨끗하고 좋은 질의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자는 것이 운영의 원칙”이라고 말했다.

사업에 실패한 후 헌책방을 열어 지금에 이르렀다는 김 씨는 “열심히 일해 자식들을 키우고 가게를 확장했지만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은 헌책방 장사를 하며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헌책방 장사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삶에 참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고도 한다. 과거 사회생활을 돌이켜보며 김 씨는 “머리를 맞대고 경쟁을 하며 남의 것을 뺏는 짓을 권하는 사회 일은 참 괴롭고 힘든 것이었다”라며 “헌책방은 그와 같은 현대의 경쟁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 질 좋은 헌 책이 들어왔을 때 그 책으로 인해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 삶이 내가 헌책방을 운영하며 받은 가장 큰 선물”이라며 여유롭게 말했다.

헌책방에 간 대학생
요즘 책을 제본하는 일이 성행할 만큼 책값이 올라 도서구입에 대한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이 커졌다. 이때 학생들은 헌책방을 찾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남희<연세대ㆍ법학과 02> 군은 “헌책방의 장점은 일단 저렴한 가격”이라며 “많이 이용해본 것은 아니지만 잘 고르면 좋은 책을 얻을 수 있다”고 전했다.

송진민<서울대ㆍ산업공학과 08> 군 역시 헌책방을 이용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싼 가격을 꼽았다. 송 군은 “평소에도 헌책방을 자주 찾는 편”이라며 “특히 새 학기가 되면 한 달에 두세 번 꼴로 집 주변의 헌책방에 간다”고 말했다. 또 송 군은 “무조건 생산해내는 일반 서점보다는 내면적인 깊이가 느껴지는 헌책방의 헌책들이 좋다”고 전했다.

헌책방만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학생도 있다. 이현수<이화여대ㆍ간호학과 09> 양은 “헌책방의 편안한 분위기를 좋아한다”며 “못 가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자주 가면 주 1회 이상 헌책방을 방문한다”고 말했다. 이 양은 “분야별로 나뉘어져 있지 않은 점이 조금 힘들 때도 있지만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물론 좋은 질의 책을 구하는 재미가 있다”며 헌책방에 가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사진 심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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