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을 이어온 논란의 역사, 한일 강제 병합
100년을 이어온 논란의 역사, 한일 강제 병합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0.08.30
  • 호수 1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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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최근 발표한 담화문에서 한일 병합이 한국인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호소카와 전 총리는 간 나오토 총리가 한일 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해야 했다고 말했다. 한일 병합에 대한 일본 정계의 시선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한일 강제 병합 체결이 조인된 1910년 8월 22일 이후 10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한일 양국의 역사 논란의 대립은 계속되고 있다.

한일 병합에 대해 전통적으로 일본 정부는 당시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사건이었다고 주장해왔다. 또 1965년 한일 협정 당시 ‘한일 병합 조약은 이미 무효’라고 표현한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박찬승<인문대ㆍ사학과>교수는 이에 대해 “일본이 조약의 무효성을 잠정적으로 2차대전 종전 이후까지만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종전 이전의 병합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본 학계는 형식과 절차상의 문제점은 인정해가고 있지만 여전히 당시 국제법상의 유효성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태진<서울대ㆍ국사학과> 명예교수가 병합 조약의 원천적 무효를 뒷받침하는 문건을 공개했다. 이 교수가 공개한 당시 한일 병합의 일본 측 조서에서는 일본의 국새와 일왕의 서명이 있지만 순종황제 측의 문서에는 서명이 없다. 일본 학계는 이를 순종에게 사전 승인이 됐던 일이라 해명하지만 한국 학계는 이것이 한일 병합의 강압적 측면뿐 아니라 비준도 안 된 조약의 결정적인 결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박 교수는 만약 이로 인해 한일 병합의 조약의 원천적 무효가 인정된다면 일본은 장차 북한과의 외교에 있어 큰 손실을 볼 입장이라고 말했다. 식민지 시대에 대해 일본과 합의한 사항이 없는 북한의 경우 이에 대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보상금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남한은 이미 한일 협정 당시 ‘독립 축하금’의 명목으로 자금 지원을 받아 식민 보상 문제에 대해 발언권이 다소 약한 상태다.

한일 병합의 결과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정태헌<고려대ㆍ한국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한일 병합을 긍정하는 한국학자들은 대부분 경제학자로서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물적, 인적, 제도적 발달에 대해 주장한다. 그러나 물적 자원은 전쟁 등의 상황으로 인해 소실돼 근대화에 그리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또 교육이나 전문적 경영인 등의 인적 자원은 이미 식민 시대 전부터 조선인들에게 큰 열망으로 존재해왔다. 일본의 정책적 차별로 인적자원 양성이 피해를 받았을 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 회사를 뺏겼던 현대 전 회장 정주영씨가 해방 후에야 비로소 대재벌 경영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나, 해방 후 학교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일본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제도적 자원이란 시장경제다. 이들은 일본의 지배로 인해 자본주의 경제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식민 시대 조선인들은 은행 경영권에서 철저히 소외돼 주류적 입지를 다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수혜를 거의 받지 못했다. 또 경제의 중심적 주체인 정부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매우 비정상적인 상태로 운영이 되는 상태에서 자본주의 일반론적 관점으로 경제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한일 병합은 100년의 세월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주제다. 식민지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식민지 이후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연구와 새로운 견해가 계속해 등장하는 가운데 한일 양국이 찾을 수 있는 진정한 합의점은 어디에 있을까.     

김명지 기자 divine15@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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