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간 역사관, 비판적으로 되짚어보다
거꾸로 간 역사관, 비판적으로 되짚어보다
  • 김민지 기자
  • 승인 2009.09.19
  • 호수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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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대안교과서 근현대사」, 식민지 근대화론 따라 서술돼

뉴라이트 학자들은 작년 초 「대안교과서 근현대사」를 내며 금성출판사의 교과서를 좌편향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최근 법원은 ‘좌편향’이라며 수정됐던 금성출판사의 교과서 저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저자의 허락없이 교과서를 수정한 것이 위법이라는 이 판결은 교과서의 수정에는 허락이 불필요하다는 이전 판례를 뒤집어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박찬승<인문대ㆍ사학과> 교수는 논문 「식민지 근대화론에 매몰된 식민지 시기 서술」에서 뉴라이트 계열의 「대안교과서 근현대사」(이하 대안교과서)에서 특히 식민지 시기에 주목해 역사관부터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 대안교과서는 표면적으로 비판적인 논조를 띤다. 하지만 서술에서 식민 지배의 억압성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식민지 근대화론’을 ‘오늘날 한국 현대 문명의 제도적 기초가 식민지배 과정에서 닦였음을 강조하는 시각’으로 정의했다. 이는 1910년을 전후한 제국주의자들의 의견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 박 교수는 대안교과서가 바로 이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서 쓰였다고 봤다.

대안교과서는 공중보건과 의료개선이 인구 증가의 배경이 됐다고 했다. 총독부가 보건위생 에 힘써 전염병의 발생과 전파를 막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 관련 사망자 수는 1920~30년대에 꾸준히 늘었다.
이는 총독부의 전염병 대책이 문제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자혜의원이 각 도에 세워졌지만 의료진이 거의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주로 한약방을 찾았기 때문에 이용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대안교과서는 도시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인의 유출에 비해 일본인의 유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조선에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약 75만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고 대부분 도시에 거주해 도시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서울 등 발전한 도시는 일본인촌과 조선인촌이 분리돼 있고 시설도 큰 차이가 있는 이중 구조의 전형적인 ‘식민도시’였다. 결국 대안교과서는 식민성을 은폐하고 근대성만 강조했다.

식민지 시기 서술에서 박 교수는 경제사 부분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대안교과서는 ‘전체적으로 식민지 한국의 연 평균 총생산은 인구성장률 1.3%를 능가하는 3.6%의 성장을 보였다’와 같이 경제 성장에 대해 언급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식민지 조선에 투자된 자본은 거의 일본 자본이었고 한반도에 독자적인 경제권이 없었는데 한반도만의 경제 성장률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대안 교과서의 식민지 시기 교육에 대한 서술에도 심각성을 표했다. 대안교과서는 ‘1936년부터 1946년까지 취학률 60%를 목표로 하는 제2차 확충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식민지 말기의 취학률은 40%를 넘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취학률이 40%를 넘었던 이유는 조선인을 전장에 동원하기 위해 일본어를 가르칠 필요가 있어서였다.

독립 운동에 대한 비중은 기존보다 크게 줄었다. 또 특정 인사의 업적에 치중해 서술했다. 김구나 안창호에 비해 이승만은 크게 부각된다. 만주사변과 관련한 서술의 제목이 ‘만주사변과 이승만의 외교활동’일 뿐 아니라 이승만이 저서「만주의 한국인」을 국제연맹에 제출했다는 부분을 강조했다. 반면 국내에서 활동한 여운형의 건국 동맹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다.

또 김구에 대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 테러활동을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이봉창ㆍ윤봉길의 의거는 테러활동이며 그들은 테러리스트다. 하지만 학계는 이들의 활동을 의열 투쟁으로 정의한다. 박 교수는 논문에서 최근 독립운동사를 균형잡힌 시각에서 쓰기 위한 노력이 활발한데 대안교과서는 오히려 과거의 편향된 시각으로 회귀한 듯 하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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