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예술단 활동 통해 본 고려인의 삶
소인예술단 활동 통해 본 고려인의 삶
  • 손수정 기자
  • 승인 2009.09.13
  • 호수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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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문화 동화 없이 주체성 지켜
‘소비에트 시대 고려인들의 예술활동’을 주제로 아태지역연구소 주최 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세미나는 김보희<한국문예연구소ㆍ국제교류팀> 팀장이 현지조사를 통해 연구한 소비에트 시대 고려인의 음악 활동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세미나에서 김 팀장은 “소비에트 시대 고려인들이 우리나라 전통 문화를 보존ㆍ발전 시켰으며 주변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고유의 문화를 지켰다”고 말했다. 세미나에서는 소비에트 시대 중앙아시아에 살던 고려인의 음악활동이 소인예술단의 활동ㆍ전개를 중점으로 소개됐다. 이를 통해 한민족의 이주역사와 한민족 문화의 전승과 보전을 조명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본래 함경도 북쪽 러시아 연해주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5개 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으로 이주했다. 이주 후에 고려인들은 집단농장을 경영하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소인예술단과 같은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해 주변 민족들에게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렸다.

소인예술단은 집단농장인 꼴호즈를 비롯한 생활현장에서 광범위한 고려인 일반대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비직업적인 아마추어 예술집단이다. 그들은 고려인 뿐 아니라 러시아인, 우즈벡인, 카작인 등 다양한 민족문화예술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의 전파기능을 담당했던 예술집단이었다.

세미나에서는 시기적으로 시베리아내전이 종결되는 1922년 이후부터 고려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노래를 통해 그들의 문화를 조명했다. 1920년대부터 고려인들은 전통문화를 계승한 노래를 만들었다. 고려인 작곡가 연성용은 우리나라 전통 민요나 가사의 영향을 받은 노래 「씨를 활활 뿌려라」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풍년가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됐다. 전문적인 작곡가가 아닌 민중의 입장에서 창작된 노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선율과 리듬을 사용했고 노동요와 유희요로 생활 속의 삶과 일치되는 민요의 기본적 조건에 일치했다.

1940년대의 고려인 꼴호즈에는 아직 강제이주 이후 초기 정착의 어려움과 혼란 때문에 소인예술단을 비롯한 문화문명기관들의 활동이 부진했다. 이 시기 고려인들은 주로 전래민요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부르던 30년대와 달리 민요풍의 새로운 노래를 작곡했다.

이전까지 고려인 소인예술단의 공연종목에는 민족 문화적 요소가 결핍돼 있었다. 이것은 강제이주와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지식인들 탄압과 한글 등 민족문화에 대한 억압정책에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많은 고려인 소인예술단들이 선정한 고려인 꼴호즈들의 경제적, 정치적 지원 덕분으로 소비에트 지도자들로부터 ‘인민집단’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호응을 얻었다. 이에 소인예술단에서는 공연의 내용에 민족 문화적 요소를 더욱 보강했다.

기계형<아태지역연구센터> 연구교수는 고려인들이 문화 포용은 했지만 동화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김 팀장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기 교수는 “중앙아시아 속 다양한 주변 민족에게 둘러싸인 고려인들은 알게 모르게 문화정체성에서도 그들과 동화되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김 팀장은 “고려인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기 때문에 자신의 문화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욕구가 더욱 강했다. 이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동화가 된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며 “러시아어만을 하는 고려인들도 된장이나 두부, 김치 등을 여전히 일상식품으로 먹는다. 또 노인공경사상을 따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르던 노래를 내 노래로 알고 있는 등 여전히 자신의 뿌리를 지켜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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