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시절 대학생
그 때 그 시절 대학생
  • 서보영 기자
  • 승인 2009.03.01
  • 호수 12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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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쌍쌍파티가 가까워질 때면 함께 갈 짝을 찾기 위해 여학교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있기도 했지” 그것도 벌써 삼십년 전 일이라며 회상에 젖는다. 학교 내의 건물들은 점점 늘어가고 학생들의 옷차림도 한 해가 다르게 변한다. 쌍쌍파티는 그 단어의 뜻조차 알기 힘들 만큼 사라진지 오래지만 우리는 여전히 대학생활의 낭만을 꿈꾼다.

  학생들의 진정한 휴식
부산에서 서울까지 대학생이 된다는 꿈에 부풀어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기쁨도 잠시 휴교령에 학교가 문을 닫았다. 1979년 봄이었다. 탱크가 학교 앞을 가로막았고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종로와 명동은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다.
그 때는 필수 교양에 교련과목이 들어있었다. 학기 중엔 군사교육을 받고 방학이면 1주일씩 병영집체훈련소인 문무대에 들어가기도 했다. 사회적 상황은 살벌했으나 정의에 대한 고민은 깊이를 더해갔다.
최창식<공대ㆍ건축공학부> 교수는 “지금은 건물이 많이 들어섰는데 그때는 학교 내에 공터가 많았다”며 “학생들은 풀밭이나 공터에서 쉬기도 하고 격렬하게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지금은 학교가 너무 복잡해져서 학생들이 쉴 공간이 없다”며 아쉬워했다. 날씨가 화창한 날은 밖에 나가 잔디밭에 앉아서 야외수업을 하기도 했다. 토론 수업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새우깡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쌍쌍파티와 미팅의 추억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 축제는 이성과의 교제가 이뤄지는 거국적인 행사였다. 쌍쌍파티에 데려갈 짝을 구하기 위해 수업을 재치고 미팅에 나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마땅한 짝을 못 찾았을 경우엔 사촌동생이나 누나와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축제 한 켠에는 ‘쌍쌍파티 파트너 대여‘라는 팻말이 붙어있기도 했다.
반면 인기가 많은 학생들은 오전, 오후로 짝을 바꿔가며 ‘고부간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최정훈<자연대ㆍ화학과> 교수는 “고고를 출 것이냐 브루스를 출 것이냐를 우스갯소리로 고부간의 갈등이라 표현하곤 했다”며 “남학생들이 이성을 대하는 데 있어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 이었다”고 웃음 지었다.
쌍쌍파티라는 목적이 굳이 아니더라도 미팅은 대학생활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각 과 대표들은 미팅 주선자의 역할을 잘 해내면 능력을 인정받을 정도였다. 다방에 나란히 앉아 통성명을 하고 고고장으로 이어지는 미팅에서부터 벚꽃나무 밑에서 이뤄지는 벚꽃 미팅, 서로 암호가 될 만한 물건을 몸에 소장하고 만나는 007미팅까지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대성리나 강촌으로 엠티를 갔다. 비슷한 시기에 엠티를 오는 타 학교 학생들과의 미팅도 엠티가 즐거운 이유였다.
남녀공학 중ㆍ고등학교가 드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대학교에 들어와서야 이성과의 자유로운 교제가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대학생들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최 교수는 “많은 남학생들은 시계탑 앞에서 공대를 지나 학교에 가는 한양여전 학생들을 기다렸다”며 “당시 한양대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에 대한 대우가 남달랐다”고 말했다.

굵은 웨이브 파마의 그 남자
교복을 입고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학교 뱃지를 달고 다녔다. 대학교 뱃지를 구해달고 대학생 행세를 하는 ‘가짜 대학생’도 있었다. 지남용<건축대ㆍ건축공학부> 교수는 “학교 뱃지를 달지 않은 학생들을 정문에서 단속했다”며 “공대학생들은 자부심 때문에 학교 뱃지 대신에 공대 뱃지를 달고 다니다가 혼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대학생이 됐지만 몇몇 교수님들은 두발단속을 했다. 진한 화장을 한 여학생이나 머리를 긴 남학생은 단속 대상이었다.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는 물론 반바지까지도 단속 했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멋 내기는 1980년대 중반이 돼서야 가능했다. 학생들은 장발에 굵은 웨이브 파마를 하고 하체에 완전히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었다. 나이키, 아디다스 손가방은 필수품이었다. 손가방 안에는 담배와 수첩, 파마머리를 정리할 도끼 빗이 들어있었다.
조민호<사회대ㆍ관광학부> 교수는 “그 당시 나이키운동화는 명품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며 “하얀 운동화에 매직으로 직접 나이키 로고를 그려 넣는 이른바 ‘사이키’도 유행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1학년 때 안 놀면 언제 놀아
교양수업을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지금에 비해 전공 수업 외에 다른 수업을 듣기가 쉽지 않았다. 160학점이 넘었던 졸업 이수 학점의 대부분을 전공 수업으로 채워야했다. 수강신청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연예인이 듣는 수업은 인기 강좌로 연결됐다. 연예인이 듣는 수업은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고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만 그 이전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놀이공간이기도 했다. 1학년 때 안 놀면 언제 놀아보겠느냐며 대부분의 1학년 학생들이 수업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밤새워 개똥철학을 논하며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수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 교수는 “요즘 학생들은 1학년 때도 결석과 지각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학점의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아 안쓰러울 때가 많다”며 “열정적으로 놀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일도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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