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가 담배 피던 시절에…
사자가 담배 피던 시절에…
  • 손경원 기자
  • 승인 2008.05.18
  • 호수 12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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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땅은 도대체 옛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학교 근처에 있는 왕십리 등에는 여러 유적과 전설 등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가 술을 마시는 왕십리 술집에서도, 우리가 산책을 하는 중랑천 근처 살곶이 공원에도, 우리가 잠자는 한양대 근처 자취집에서도 옛사람들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번 개교기념 특집호를 맞아 한양대와 가까운 동네의 역사와 전설을 살펴봤다.              

일제시대 왕십리의 모습

“십리를 더 가 도읍지를 찾으시오”
왕십리 지명의 유래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조선의 도읍을 찾아보라고 명했다. 명을 받은 무학대사는 전국을 떠돌다 왕십리에 와서 지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소를 타고 지나가는 노인이 채찍을 들어 소를 때리며 하는 말이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같구나”라며 “좋은 곳은 모두 버리고 엉뚱한 곳만 찾고 있으니”라고 말했다. 이에 무학대사는 그 말을 듣고 정중히 예를 갖춰 물었다. 노인은 멀리 서북쪽을 가르키며 “십리를 더 가 도읍지를 찾으시오”라고 말했다. 무학대사는 그 노인의 말을 들어 십리를 더 가 경복궁의 궁궐터를 잡았다 한다.

또 왕십리에는 청련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은 신라시대에 세워졌으며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증건했다고 전해진다. 청련사 부근에는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바위터가 있었고, 주변에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이 곳에 은신한 적도 있었다. 6·25사변으로 소실됐으나 1954년 대웅전과 삼성전이 보수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한성부에 혹했지만 도성 안처럼 번화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대부분 이곳 주민들의 생업은 농업이었다. 고서에 의하면 왕십리 근처는 한양 전역에 채소를 공급하는 지역이라고 전해진다. 또 조선시대의 주 교통로로 이용됐다. 당시 왕십리는 도성에서 동대문을 나와 배를 통해 3남 지방으로 가는 중간 거점이었다.

일제시대 왕십리는 조금씩 근대화된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30년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신당동 일대를 근대화하기 시작하면서 왕십리로 그 파급효과가 이어졌다. 오늘날 왕십리역, 성동 경찰서 등이 위치한 사거리 등에서 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들이 들어섰다.

도장골
우리마을 정문 쪽을 차지하고 있는 동네인 행당동. 예로부터 이곳에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아 행당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어졌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진펄리 혹은 진팔리로 불려졌다. 조선시대 행당동 근처에는 배추가 많이 재배됐다.

행당동 산 128번지 남쪽 언덕에는 아기씨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원래 왕십리역 부근에 있었으나 4차례에 걸친 이전 끝에 지금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아기씨당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북쪽나라 공주 5명이 나라가 망한 탓에 시녀들과 함께 남쪽인 왕십리 근처로 피난을 왔다. 공주들은 산속에서 머물며 몇 해를 풀뿌리와 산나물로 연명했다. 그러다 찔레 꽃이 핀 봄 날 다섯 공주는 찔레꽃을 따 먹다가 찔레꽃을 입에 물고 죽게 됐다.

훗날 왕십리에 마을이 생기고 인구가 늘자 다섯 공주가 마을사람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이러한 꿈을 믿지 않았다. 그 후 마을에는 이상한 괴변과 질병이 돌기 시작했는데 이에 놀란 주민들은 다섯공주의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왕십리 일대의 옛 풍습 중에 처녀가 결혼을 하면 신랑이 처가에 삼년 이상을 살다가 첫아이를 낳은 후 시댁으로 돌아가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왕십리 다섯 아기씨들이 왕십리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타동네 밖으로 나가 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일제시대 때 이곳에는 아편중독자 수용소가 있었다. 또 유실수를 심는 공사가 대규모로 진행돼 많은 사람들이 이공사를 위해 고용됐다. 이로 인해 품삯을 받으려고 도장을 찍는 행렬이 줄을 이어 도장골이라는 별칭도 붙게 됐다.

옛날 살곶이 다리의 모습

축구장 근처 ‘사근사’
사근동은 신라시대 세워진 절인 사근사에서 부터 마을이름이 유래됐다. 사근사는 우리학교 축구장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미나리나 채소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많이 살았다. 

사근동에는 우리학교 학생들이 산책로로 자주 이용하는 살곶이 공원과 살곶이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왕이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겨했다고 전해진다. 또 살곶이벌은 국왕이 군대를 사열할 때 이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근처에  풀과 버들이 무성한 곳에는  목장을 설치해 말을 기르기도 했다.  살곶이 다리는 조선 성종 14년(1484년)에 완성됐으며 정식명칭은 제반교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다리는 목교였으나 홍수에 견디기 위해 살곶이 다리는 돌로 만들어졌다. 또 당시에는 조선팔도에서 가장 긴 다리로 기록돼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증건하면서 살곶이 다리의 일부를 헐어 석재로 써서 다리의 일부가 소실되기도 했다. 그 후 살곶이 다리는 방치돼 훼손됐다가 1973년  유실된 것을 복원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살곶이 벌에는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강감찬이 한양판윤이 됐을 때 이 근처에서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 강감찬은 아전에게 쪽지를 주면서 “내일 새벽 북동쪽으로 가 바위에 걸터 앉아 늙은 중을 관하에 데려오라”고 말했다. 이에 아전은 북동쪽으로 가니 남루한 옷에 흰 두건을 쓴 늙은 중이 있었다.

아전이 쪽지를 주니 늙은 중은 관아에 와 강감찬을 보고 머리를 조아렸다. 강감찬은 “네가 금수 중 영물인데 어찌 사람을 해치냐”며 “닷세 말미를 줄테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했다. 늙은 중은 그 이야기를 듣고 백배 사죄했다. 이튿날 아침 아전을 시켜 살곶이 벌에 나가보나 했더니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수십 마리의 호랑이 무리를 이끌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호랑이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사근동에는 남이 장군을 모시는 사당도 있다. 남이장군이 인명을 해치는 백호를 잡기위해 이 사당 근처에서 기거하다가 호랑이가 나타나자 맨주먹으로 때려 잡았다. 이에 주민들은 남이장군의 공적을 기리며 이곳에 사당을 세워 제를 올렸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사당에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했다. 한국전쟁 때 마을에 피해가 없었고 전사한 사람도 없었는데 마을사람들은 남이장군을 모신 덕택이라 믿고 있다.

마장동 우시장의 옛 모습. 옛날에는 소를 직접 거래했다.

말 기르던 양마장
조선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있어 마장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말의 수요가 많아 전국적으로 양마장을 설치했는데 마장동도 그 중 일부였다. 일제시대에는 마장동을 웅마장동 등으로 불렀는데 이를 통해 일제시대에 마장동에 있었던 양마장에는 숫말만 키웠음을 알 수 있다.

마장동은 대부분은 토지가 국유지였다. 이 때문에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가 됐다. 조선총독부는 마장동의 땅을 일본일에게 임대해 주는 등  일본인 농업이민을 장려했다.   

또 마장동에 서울최대 규모의 축산물 시장이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소를 직접 거래했다. 이 때문에 노인들은 현 축산물시장을 가르쳐 우시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우시장은 원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었으나, 숭인동이 상업지구로 지정되면서 1961년 마장동 쪽으로 옮겨왔다. 

현재 동명초등학교 내에 있는 언덕은 왕좌봉이라 불린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이곳에 올라 서울의 지형을 살펴 보았다 전해진다. 또 봉우리 중턱에는 가뭄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을 구제했던 기민단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장동은 미나리의 생산지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는데 하루 생산량이 200차 정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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