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대상] 그 남자의 사정
[2023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대상] 그 남자의 사정
  • 길창은<인문대 국어국문학과 19> 씨
  • 승인 2023.12.04
  • 호수 1576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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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여자의 결심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내가 문학으로 사랑을 논한다니, 우스운 일입니다. 하지만 남녀가 만나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만을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이 흑과 백뿐이라고 단정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일기를 쓰다가 모든 페이지마다 그의 이야기가 적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조금씩이라도 그가 나의 삶에 흔적을 남겼고 그 티끌들이 모여 태산처럼 지대해졌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나중에는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나한테는 이런 어려운 사랑밖에 찾아오지 않는 것인지, 어째서, 나에게는 사랑이 이렇게 나빠야만 하는지를요.

 

그래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2. 그 남자의 사정

문화센터 강사로 일하는 것의 장점은 영감의 원천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영감이 한없이 샘솟습니다. 물론 영감이라 해봤자 작은 개울만도 못한 사소한 발상일 때가 많지만요. 이것은 제가 연구하는 추상화라는 영역의 작업이 그리 쉽지만은 않기에 유독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초짜 화가인 내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그저 걸작들을 모방한 아류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만 그릴 수 있으면서 충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은 작업에 집중하고 싶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화센터 미술 강사 겸 무명 화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남들 눈에는 비생산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는 이 일을 통해 스스로 충만해짐을 느낍니다. 그래서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범한 미술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반을 3개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수요가 많습니다. 오후 세 시와 다섯 시는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초중생들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만, 그래도 애들은 애들입니다. 그 순수함이 부럽고 사랑스러워, 하루종일 피곤하고 분주함에도 일이 즐겁습니다.

아홉 시에는 연령대 상관없이 그림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옵니다. 머리를 식히고 싶은 고등학생이나 취미가 필요한 성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원래는 일곱 시에도 클래스가 있었으나 인원 부족으로 최근에 폐강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타임 모두 여섯 명씩 정원을 꽉꽉 채워서 수강생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 명씩 사라졌습니다. 조금은 슬플지라도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딱히 자책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기존 수강생들이 빠지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으니 구성원이 순환하는 느낌이 들어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감사하게도 아홉 시 수업에는 고정 멤버가 세 명이나 있습니다. 3회 수업에서 가장 출석률이 좋은 수강생은 20대 직장인인 지수 씨입니다. 처음 왔을 때 충격적일 정도로 그림을 못 그렸던 지수 씨는 지금은 인물의 형체를 어느 정도 구현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 년 동안 꾸준히 해왔기 때문일까요, 움직이는 사람도 어찌저찌 그릴 수는 있더군요. 물론 저라면 그것보다는 잘 그렸겠지만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다는 점이 멋있습니다.

고정 멤버 중 나머지 두 사람은 결석이 잦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주영이는 대입을 앞두고 있으니 공부하느라 바쁘고, 40대 직장인인 박 선생님은 그림 외에도 취미가 많으신 탓입니다. 그래서 지수 씨와 둘이서만 수업하는 날이 종종 있는데, 어색함을 달래려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지수 씨가 그림을 꾸준히 그리려는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수 씨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하지만 오랜 꿈이 있더군요. 그건 바로 소설가였습니다. 퇴근하고 종종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틈틈이 습작을 한다는 지수 씨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웹툰도 아니고 소설이랑 그림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일러스트를 넣으시려고요? 아니면 표지?”

상관이야 없죠. 그런데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요.”

 

그 모든 장면을 상상할 수 없더라도 당연히 소설을 쓸 수는 있겠죠. 문학가와 미술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법칙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지수 씨에게서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그것을 온전하게 창조해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했을 지수 씨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습니다. 그런데도 도저히 풀리지 않아 결국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지수 씨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습니다.

 

 

지수 씨는 오랜 꿈에 대해서만 알려줬지, 자기가 쓰는 소설에 대한 실마리를 절대로 흘리지 않았습니다. 장르가 무엇인지, 시공간적 배경이 어떻게 되는지, 주인공의 직업이 무엇인지와 같은 정보들 말입니다. 대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었는데 저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열심히 궁리하고, 나누었던 말들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지수 씨의 소설에 대해 진득한 추리를 펼치곤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어떤 옷을 입을까요?”

하얀색 긴 가운.”

너무 전형적이지 않나요? 하지만 과학자들이 대부분 그런 옷을 선택한다는 건 누구나 입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겠죠?”

과학자도 과학자 나름 아닐까요? 기계공학자는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을 거고 화학자는 좀 더 꽁꽁 싸매고 있다든지요.”

!”

 

패턴이 항상 이랬습니다. 너무 당연한 질문이 우리 앞으로 던져지면,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지수 씨의 머릿속에서 나온 질문들이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이런 걸 물어보네, 싶은 것들이요. 저는 거기에 구색 맞추는 게 제법 즐거웠습니다.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실없는 대화였지만 우리는 이런 주제로도 대화를 오랫동안 주고받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소소한 대화들이 지수 씨에게는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매번 이런 주제가 우리 대화를 공백 한 칸 없이 채웠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제는 지수 씨가 이런 질문을 한 적도 있습니다.

 

실의에 빠진 사람.”

실의에 빠진 사람은 왜요?”

어떤 자세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그려보시면 되죠.”

제 실력 아시면서.”

 

그러면 저는 지수 씨의 맞은편에 앉아 종이와 연필을 꺼내어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보면서, 실의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 한참을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면 수업 시간이 훌쩍 지나서 함께 문을 닫고 퇴근한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센터에는 제 강좌밖에 없거든요. 그러고 지수 씨와 작별하고 집에 가면서 저는 퍼즐을 맞추는 작업을 합니다. 실의에 빠진 과학자 주인공? 아니면 주인공 과학자가 성공을 거둔 탓에 실의에 빠지게 된 그의 경쟁자? 아니면 주인공 과학자가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뒷전이 되어 실의에 빠진 그의 연인? 어떻게 조합해봐도 지수 씨가 어떤 글을 쓰는지 추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직관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지수 씨는 추리물이나 스릴러를 쓸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어떤 인물의 일대기를 담은 작품? 아니면 일상적인 사건을 새롭게 조명한 신선한 관점의 소설일 수도 있고요. 그래도 확실히 아닐 것 같은 장르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로맨스였습니다. 지수 씨는 신선한 사람이라, 질질 흘러넘쳐서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나 진부한 전개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언제나 추리의 끝은 똑같았습니다. 직접 말해주기 전까지는 모르겠다는 것. 그리고 지수 씨의 입을 통해서 정답을 알게 될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제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지수 씨는 나보다 한 살 많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지는 3년쯤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일자리를 구하는 데 성공해버리는 바람에 차분하게 골방에 갇혀서 소설 쓰기에 전념할 시간이 아예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틈틈이 책을 읽고 무엇이든 끄적일 시간은 있어서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지수 씨에게 책 추천을 부탁했습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출력된 추천 1순위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었습니다. 정말 예사롭지 않은 선정에 저의 반응은 당황인지 황당인지 아무튼 고장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곱씹고 보니 지수 씨답더군요. 지수 씨는 신선한 사람이니까요.

 

그런 거 말고요.”

반지의 제왕이 어때서요! 지레 겁먹지 마세요.”

너무 길잖아요. 일단은 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부터.”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니

 

그날 지수 씨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가 종이에다 소설 세 권의 제목을 휘갈겨 써주고는 집에 갔습니다. 판단은 스스로의 몫이니, 혹시나 내용들이 가볍지 않더라도 자신을 너무 원망하지 말라는 넋두리는 덤이었습니다. 급하게 떠올려야 해서 제대로 기억 안 났다나. 제법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 같았는데. 일단 저는 미소로 알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고민하던 지수 씨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왜 기억하냐면, 혹시나 나중에 지수 씨가 고민하는 사람의 표정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미세하게 떨리던 미간의 움직임, 고민으로 꽉 차오르던 눈동자가 기울어진 방향,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하던 입술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지수 씨는 긴 책 목록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해서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목록에 빼곡히 적힌 제목들을 대충 훑고 나자 어쩐지 반지의 제왕이 궁금해진 건 지수 씨에게는 비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수 씨와 공유하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우리 사이는 제법 친밀하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낮에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지수 씨에게 알려줘야지 했고, ‘우수에 찬 눈빛과 같이 지수 씨가 애먹을 것 같은 주제가 생각나면 안 잊어버리려고 애쓴다든지 했습니다. 나의 일상은 그렇게 유쾌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생동감 넘치는 변화를 겪고 나니 추상화 연구에도 중요한 변화가 찾아올 것만 같았습니다. 하루는 제가 먼저 지수 씨에게 물었습니다.

 

추상화는 관심 없으세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잘 몰라요. 미술 시간에 집중해 본 적이 없어서.”

 

그날 우리는 늘 해오던 인물화 실습 대신 추상화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수 씨는 제 설명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인물화를 대할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열성적인 반응에 나도 덩달아 신났습니다. 그래서 사진도 몇 개 보여주었습니다. 그 흥미로워하는 표정의 형태를 기억하려고 또 한참을 보다가, 이제는 익숙해진 미간의 미세한 움직임을 또다시 포착해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하고 나자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었습니다.

 

이번엔 뭘 그렇게 고민하세요?”

아니여기에 무슨 의미를 담았을까 도저히 모르겠어서요. 제가 맞히고 싶으니까 정답은 알려주지 마세요.”

 

결국 그날 지수 씨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뭐 주말 내내 실컷 생각해서 다음 주에 결론이랍시고 와다다 쏟아낼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지수 씨는 역시 영리하고 신선한 사람입니다. 문화센터의 문을 잠그고 각자의 집으로 갈라지기 직전, 지수 씨가 투정처럼 가볍게 한마디 해주고 사라졌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습니다.

 

“ ‘라는 말을 들으면 그림 화 자로 연결이 안 돼요. 저는 단어를 다루는 게 더 익숙해서 그런가, 구체화 가시화 이럴 때 쓰는 화가 자꾸 생각난다고요. 그래서 내 머리로는 답이 안 나오나.”

 

추상화(抽象化). 추상적이게 만든다, 라는 뜻도 된다는 거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만, 나는 그동안 본질을 놓치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습니다. 혼자서 집에 가는 길에 추상화 세 글자를 검색했습니다. 중요한 특징을 찾아낸 후 간단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래서 내가 문화센터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번에는, 작은 개울보다는 더 깊고 넓은, 우물 정도는 될 것 같았습니다. 물론 한참을 더 파야겠지만요.

이때는 아직 겨울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봄이 찾아올 것 같다고 시기와 느낌으로 예측하게 되는 그런 덜 싸늘한 계절.

 

 

3. 그 남자의 결심

 

여자친구가 생긴 것은 그로부터 한 달 정도 뒤의 일입니다. 희수는 친구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나와 동갑이고, 성격과 취향이 골고루 비슷했습니다. 상호 보완도 잘 되고, 무엇보다 희수에게는 상대를 기쁘게 만드는 선함이 있었습니다. 고백은 희수가 먼저 해서 사귀게 되었지만 나도 희수가 좋았기 때문에 먼저 용기내줬다는 점이 고마웠습니다.

 

이상하게 지수 씨가 걸렸습니다. 우리는 제법 친한 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의 관계로 정의하자니, 그것도 참 애매했습니다. 같이 밥 한 끼 먹은 적도 없고 문화센터 밖에서 꾸준히 연락이나 만남을 주고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희수와 연인이 되면서 지수 씨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단언했습니다. 우린 그냥 강사와 수강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요. 하지만 지수 씨와 마주칠 때마다 그녀와 함께 보냈던 저녁 아홉 시의 시간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시간의 밀도는 결코 작지 않았는데, 이렇게 쉽게 재단해버려야 한다는 게 어쩐지 서운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게 지수 씨를 좋아하는 감정은 아닐 거라고 저는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그러니까, 일종의 동맹 같은 거죠. 서로의 예술적인 도약을 위한 상부상조 관계. 하지만 막상 상부상조 네 글자로 단정짓고 보니 너무 정 없는 것 같아서 저는 그냥 생각하기를 관두었습니다. 일단 저에게는 확실하게 관계가 정의된 애인이 있었으니까요.

 

혼란을 덜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대하는 지수 씨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수 씨는 쿨합니다. 시크하거나 까칠한 건 또 아니고 그냥 딱 쿨하다. 그 정도입니다. 융통성 있고 생각 유연하고 선을 넘지 않는 유머를 겸비한. 지수 씨는 그런 신선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친해져서인지 나를 대할 때 예전보다 더 털털해진 것 같았습니다. 최근 들어 부쩍 그런 느낌을 받은 거긴 했지만, 아무튼 친해지기 위해 애써 곁들이던 불필요한 대화들이 사라지고 나니 우리 사이에는 간단한 일상 나눔과 그림 이야기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시덥잖은 질문은, 어쩌다 한 번씩만. 이제 나는 희수에게만 집중하면 되었습니다. 그때는 막 여름이 시작될 것 같은 계절이었습니다. 두꺼운 옷은 다 집어넣고, 혹시나 더우면 벗을 수 있는 외투 정도만 걸치면 되는 그런 계절이요.

 

 

그렇게 별 일없이 지냈습니다. 희수와 나는 장거리 연애를 했지만, 시간 내어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또 끊임없이 사랑하는 그런 연인이었습니다. 지수 씨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지수 씨는 열중할 때 유독 과묵한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말이 많이 사라진 걸로 보아 그림 그리는 데에 끈기가 제법 생긴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성실하게 인물 스케치를 계속해서 연습했습니다. 지수 씨가 그림을 배운지 네다섯달 정도 된 시점이었고 지수 씨의 실력은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예전의 엉망이었던 그림 실력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모습에 나도 괜히 자극받곤 했습니다.

 

실력 엄청 늘었네요. 좋다.”

, 그래요? 뿌듯하다.”

 

모호한 대답에 불충분함을 느꼈습니다. 가볍고 사소한 칭찬 하나에도 질문과 대답이 여러 번 오가고, 그 사이마다 농담도 많이 섞였던 예전과는 너무 온도차가 많이 났습니다. 언제나 신선했던 지수 씨의 이런 건조한 반응이 왠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견디기 싫었습니다. 저는 반응이 거기서 끝이냐고 장난스레 타박하는 대신 애써 다른 주제를 꺼냈습니다. 대화가 더 이어질 만한 주제를 신중하게 골랐건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소설 잘 써지세요?”

글쎄요. 나쁘지 않을 걸요.”

 

어쩐지 대화가 자꾸 끊기는 듯한 느낌이 싫었습니다. 왜 지수 씨랑 어색해진 것 같지. 최근엔 주영이랑 박 선생님이 열심히 출석하셔서 지수 씨랑 둘만 있었던 적이 거의 없긴 했습니다. 그래, 그래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때 어색한 침묵을 깬 건 지수 씨였습니다.

 

, 7시 반으로 옮길까요?”

아니요.”

 

나도 모르게 딱 잘라서 안 된다고 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예 그만두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간을 옮긴다는 건데, 그게 왜 그렇게 싫었을까요. 나의 그런 난데없는 반응에 지수 씨도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너무 단호하시네.”

그 시간에는 고등학생이 더 많아요.”

상관없어요.”

왜 옮기려고요?”

 

지수 씨가 잠깐 침묵했습니다. 이유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표정을 또 이리저리 뜯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하기에는 너무 찰나라 순간적으로 지수 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놀라서 그만 눈을 피해버렸습니다. 지수 씨도 시선을 피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저녁 시간이 너무 애매해져서. 그런데 그냥 원래 오던 대로 올게요. 저까지 없으면 9시 수업은 폐강될 수도 있잖아요.”

그렇죠, 맞죠. 감사합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지수 씨와의 한 시간이 나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때까지 진실되다고 믿어왔던 관계와 사랑에 대한 나의 모든 확신에 균열이 왔습니다. 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로 지수 씨와 나는 예전처럼 지냈습니다. 훨씬 담백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선했습니다. 지수 씨는 변함없이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해왔고, 나는 그에 답해주며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유대감 같은 건 쌓아 올릴 틈 없이 그저 할 일을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습니다.

 

지수 씨는 어땠을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그 시간이 제법 고역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 지수 씨의 손등을 감싸쥐고 드로잉을 고쳐주고 싶다는 충동이 갑자기 올라왔고, 지수 씨가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날이면 드러나는 동그란 두상에 한참동안 시선이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애써 그 마음을 억누르는 동안 뜨거운 여름이 지났습니다. 곧 가을이 올 것 같았습니다.

 

 

11월에는 인물화로 유명한 한 작가의 전시회가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 전시 티켓을 두 장 얻었습니다. 지수 씨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레퍼런스를 많이 보는 것도 아이디어에 도움이 되니까요. 물론 지수 씨가 화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문학도 같은 예술이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인물화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연습 중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지수 씨였으니까. 권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갈 수는 없었습니다. 아쉽고 말고를 떠나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희수에게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희수와도 갈 수 없었습니다. 희수는 너무 바빴고, 거리도 너무 멀어 서울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지수 씨에게 표를 넘겼습니다. 한 장만 넘기려다가 그냥 두 장 다 줘버렸습니다. 그냥. 표의 처분을 지수 씨에게 맡겨버리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지수 씨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자. 그렇다고 지수 씨가 나한테 같이 가자고 말하는 일은 없겠지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일 것입니다. 일단 당장은 내가 아무것도 결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재차 말하지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우려하던 그 일은 당연히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티켓을 받아든 지수 씨의 표정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나던 눈동자도 그날에는 그저 탁한 빛으로 번져나갔고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녹아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티켓을 건네고 반응을 관찰하던 그때 혼란스러웠던 내 마음과 터질 것 같았던 심장의 박동만 또렷이 기억납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나는 깔끔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 와중에 지수 씨가 그 전시를 누구랑 보러 갔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차마 대놓고 물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빙빙 돌려서 다른 것부터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시, 보러 갔어요?”

. 좋던데요.”

영감은 좀 얻었어요?”

영감은 모르겠고, 감탄하다가 왔어요. 저렇게 그릴 수도 있구나 싶더라고요. 물론 내 눈에는 선생님도 대단하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 인물화만 열심히 연구한 사람은 저렇게 섬세하고 역동적인 그림을 그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막 들었어요. 분명 2D를 보고 있는데, 멈춰있는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생동감 넘치고. 멋졌어요.”

 

그렇게 말하는 지수 씨의 표정을 그 작가가 봤더라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요. 걸작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감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수 씨처럼 신선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드물거든요. 특히 대한민국 20대 직장인이 그런 표정을 짓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지수 씨는 그걸 해냅니다. 물론 희수의 표정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지수 씨만이 가지고 있는 그 신선함은 정말 독보적인 느낌입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수 씨의 그런 독보적인 느낌, 을 혹시 나만이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럼 나의 손끝에서 탄생한 지수 씨의 모습은 어떻게 존재할까. 이번엔 그래도 내가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해도 괜찮은 것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당장 연필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추상화에 대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흐릿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분야입니다. 하지만 지수 씨에 대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그 다채롭던 표정들이 선연히 떠올랐습니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는 명료했습니다. 일단 종이에 내가 기억하는 지수 씨의 모든 모습들을 그렸습니다. 이제는 다채롭다는 어휘로도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나의 그 모든 행위는 지수 씨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던 시간들이 부질없었다는 사실만을 증명했습니다. 희수와 만나기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뇌리에 박혀 있었던 지수 씨의 크고 강렬한 흔적을 영영 덮어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그리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수 씨의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문화센터 강좌를 쉬었습니다. 작업에 집중하려는 목적이 가장 컸지만 무엇보다 지수 씨를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애써 얻은 영감을 다시 심연 아래로 묻어버리고 죄책감에 휩싸여 살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지수 씨와 초상화로 함께하는 동안 상념은 잊고 작업에만 집중했습니다. 모나리자를 그린 다빈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감히 그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저에게도 그런 오묘한 확신은 들었습니다. 지수 씨를 사랑했건 아니건, 그녀는 나의 절대적인 뮤즈라는 사실을요.

 

초상화를 완성한 뒤의 느낌은 의외로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지수 씨의 신선한 모습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지만, 뭔가 불충분했습니다. 지수 씨가 나에게 던져왔던 그 종잡을 수 없는 질문들만큼이나, 그리고 최근에 나에게 무미건조하게 대답할 때의 느낌만큼이나요.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굳이 하나의 정답이나 특정한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색을 맞추고, 넓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추리를 했죠. 그래서 나는 여기서 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특징을 찾아낸 후 단순화하는 작업 말입니다. 그래서 지수 씨를 그린 캔버스 위에 바로 망설임없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나의 모든 고뇌가 비로소 해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4. 그 여자의 사정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습니다. 로맨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없었다는 게 작은 이유였고, 자꾸 소설 속 주인공에게 애정을 쏟게 된다는 점이 큰 이유였습니다. 내가 만든 세계에 대한 애착이 원래부터 강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래 그렇게 감정적인 작가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보아도 나는 자꾸만 남자주인공에게 애정을 주었습니다.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뻔한 개연성을 넣고, 남자주인공의 애인에게서는 매력을 빼앗으려다가 포기했습니다. 유치한 행동인 것 같아 얼굴도 성품도 모르는 그녀를 개성도 없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매력적인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주인공을 사랑하는 남자주인공. 어쩐지 쓸수록 비참해져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로 인해 겪었던 감정들을 경박한 어휘들로 적고 싶지도 않았고, 진부하게 다루고 싶지도 않았고, 유치하게 그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 손을 스치며 그림을 알려주던 그 부드러운 손길을 어떻게 못 본 체할 수 있으며, 좋은 게 생겨서 날 가장 먼저 떠올렸다던 그 친절함을 어떻게 없던 것으로 할 수 있나요? 사소한 질문 하나에도 성의껏 답변해주던 그 세심함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며, 잠자코 그림을 그리던 나를 바라보던 그 뜨겁던 눈동자를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고작 이런 것도 사랑이었다고 나는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이 한동안은 억울했습니다. 여자친구가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늦은 봄에 알게 되었습니다. 벚꽃은 이미 지고 잔해로 남아 땅바닥을 빼곡하게 덮을 그럴 계절에 말입니다. 그렇게 분홍빛 낙화로 덮인 길도 만발한 벚꽃만큼이나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우리와 물리적으로 더 가까이 있는 건, 이미 낙화한 벚꽃잎 아닌가요? 그런 식으로 위안을 삼고 나면 이제 그 생각은 그만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막 눈물이 나면서 사무치게 힘들었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머리로나 가슴으로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일 줄 알았습니다. 그에게 나를 좋아했다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그런 게 궁금해지는 저녁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도 저놈이 나한테 왜 또 저러나, 혹시 그 여자친구와 헤어지기라도 했나 싶을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물론 그런 복잡한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졌습니다만, 타이밍 좋게 그가 전시회 티켓을 건넸습니다. 하필 두 장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로 줘서 수상했습니다. 두 장이면 딱 여자친구랑 가면 될 것을, 왜 나한테 준담. 그래서 나는 혼자서 전시회에 갔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서 무거운 사유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예술에는 필연적으로 사랑이 담기는 걸까요? 캔버스에 그려진 모든 인물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그 섬세한 재현 안에 저마다의 사랑이 진하게 묻어있었습니다. 어떤 사랑은 순수했고, 어떤 사랑은 차가웠으며 어떤 사랑은 어려웠습니다. 집에 오면서도 그림들이 계속해서 아른거려, 버리려던 남은 표 한 장을 다음 날 그대로 전시관에 갖다주었습니다. 다시 봐도 경이롭고, 또 어려웠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예술과 사랑에 대한 교양수업을 하나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이 가장 궁극적인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것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들게 된다. 모든 사랑에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파괴적이거나 모순적일지라도, 일방적이거나 비참할지라도요. 나는 그래서 그가 갑자기 내 삶에 찾아와 마음속 가장 깊숙한, 그래서 누구에게도 쉽사리 보여줄 수 없었던 구석구석을 헤집어놓고 간 이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가 나에게 남긴 사랑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명쾌하게 해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늦은 저녁 그와 둘이 문화센터에서 나누었던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처럼요, 그가 애정을 갖고 연구한다던 추상화처럼요. 모호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내 소설에 어떻게 그를 담아야 할지를요. 그리고 그와 내가 주인공인 그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을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민하다 보니, 그에게 나는 무엇이었고, 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일지도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으리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겼기를. 그랬다면 이 사랑은 더이상 나쁜 사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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