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우수상] ‘세계’와 ‘바깥’의 관계론
[2023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우수상] ‘세계’와 ‘바깥’의 관계론
  • 배준영<인문대 국어국문학과 20> 씨
  • 승인 2023.12.04
  • 호수 1576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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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텍스트의 블랑쇼적 독법 가능성

. 해체된 주체의식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 「먼지처럼부분

코끼리다. 근하신년에 엽서를 띄워온 것도,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도, 비열한 거리 위 운전기사 최씨의 통화 상대도. 기린이나 코뿔소여도 좋을 그 자리에 이장욱은 집요하게 코끼리의 이미지를 양각화한다. 물론 이때의 코끼리란 실체라기보다 떠도는 이미지다. 때로 그 모습을 바꾸며 다채로운 형태로 출현하는 비인칭의 인물은 이장욱 문학의 환상성을 매개한다.

모리스 블랑쇼는 주체가 해체된 사실에 대한 예민한 의식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은 20세기 문학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아의 분명한 기원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시도다. 지난 2005, 일종의 첨단적 모험으로서 권혁웅이 불러온 미래파 논쟁은 그러한 해체 의식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른바 다른 서정을 표방하며 쏟아진 문인들은 이제 어엿한 우리 문단의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삶 자체를 낯설게 하는, 미래파 문학의 새로운 서정에 대해 혹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폐쇄적이고 때로 자폐적인 서술 양태는 독자와의 소통 가능성 자체를 지운다. 이 단절과 공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블랑쇼적 독법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한 새시도다. 새로운 시선과 독법으로서 그 가능성의 모색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낯선 타자블랑쇼의 시선을 투영해 미래파 문학의 전형(典刑) 이장욱의 텍스트를 재독할 것이다.

. 실종과 바깥경험
나는 조금씩 너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무것도 회상하지 않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 「실종부분

이장욱 문학에서 실종은 빈번하게 등장하는 모티프다.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나, “너에게 전달되사라지기 시작한다. “고양이처럼 섬세하게/ 숨고 달리다가 영원히/ 사라지”(내일은 중국술을 마셔요부분)는가하면 나는 내 얼굴을 지우고/ 그 얼굴을 기억하는/ 다른 얼굴이 되”(새들의 비밀부분)기도 한다.

그의 소설 역시 실종에 주된 모티프를 두고 있다. 시가 실종을 향해 치닫는, 실종되었음을 알리는 일종의 소문이라면 소설은 서사가 부여된 소문으로서 하나의 증언이다. 트로츠키와 야생란에서 이장욱은 한 개인의 죽음이 타자로 하여금 기억되고 호출되며, 항구적으로 재생산되는 방식을 서술한다. 어떤 죽음도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는 믿음으로부터 이장욱은 죽음이란 평행을 달리는 두 개념을 하나의 소실점에서 포착한 것이다.

시와 소설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이 실종 사건은 블랑쇼의 바깥의 경험과 치환된다. 블랑쇼에 의하면 바깥의 경험이란 곧 존재(세계에서 존재한)의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다. 이는 죽음으로 접근하는 주체, 타자의 죽음을 체험하거나 사회로부터 추방된 불행의 경험이다. 자아란 오직 타동성 가운데서만 정립되므로, 세계와의 관계 내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바깥 경험이 가져온 세계와의 관계에 단절은 또 다른 단절, 자아와 자신 사이의 단절을 야기한다.

트로츠키와 야생란은 바깥경험의 전형적인 체험기다. 그의 서사는 이미 죽었거나, 죽음으로 접근하는 인물의 서사다. 이처럼 파편화된 개인이 체험한 바깥경험은 이장욱식의 환상과 결합하며 전위적 차원에서 소설화된다. 블랑쇼에게 죽음은 극단적 수동성이다. 그러므로 바깥의 경험 역시 자의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다가옴으로써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저기 존재하는 저것이 그냥 저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p98) 삶이 흘러가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들이 인생을 이”(p10)루듯이. 이장욱 소설에서 수동성은 우연의 이름으로 쓰인다.

잠수종과 독은 애인이자 사진작가였던 현우의 죽음을 체험한다. 모든 것이 우연으로 점철된 죽음이었으므로, “불길이 치솟았다는 것과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것 사이의 인과관계는 공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p32) 의사인 공의 앞에 분신(焚身)을 시도한 방화범이 집중치료실 환자로 누워있다. 주사기를 쥔 채로 인과 없는 죽음의 가담자와 마주할 때, 공의 자아는 성립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는 외로운 궤도에서 떠돈다.

정희를 친구로 둔 의 이야기를 담담한 어투로 풀어간 유명한 정희역시 바깥 경험의 주체로서 두 인물이 시차를 두고 얽힌 양상을 보인다. ‘정희가 극성 태극기 부대원으로서 택한 분신자살과 어릴 적의 정희를 향해 느꼈던 살의란 정말 무관한 것일까? 그때의 살의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자 의아한 일”(p170), 그러므로 머리로 안다고 해서 진정으로 자각할 수 없는 것. ‘거의 평생을 생각해왔는지도 모를 그 살의에 대해, 앞으로의 시간을 또 할애할 것이다. 그래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를진실로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 바깥의 세계란 현존하는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p171)

보다 희망적인 전언으로서 귀 이야기는 바깥 경험에 대응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귓속에서 자꾸 나무들이 자란다”(p64)고 주장하는 친척‘(이승복으로 추정되는) 친척의 친구를 찾아 여행은 시작된다. 여기엔 의 친구 예수가 동행한다. 블랑쇼는 환상성을 근본적인 소외의 표현으로써 다룬 바 있는데, 이 관점에서 친척은 또 한 명의 바깥을 경험하는 주체다. “친척의 친구는 이미 어렸을 때 죽었는데 요즘 자꾸 그 친구가 생각나고 눈에 선하게 보인다”(p49)는 진술과 귀에서 자라는 나무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맞닿는다.

한편 예수와 달리 친척과 적극적인 소통이 가능한 인물이다. 동시에 친척을 연결 짓는 인물인데, (그 이름처럼) ‘예수공동-존재를 매개하는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블랑쇼의 공동주의적 전망에 근거하는데, 자아와 타자가 바깥 경험으로부터 관계를 맺을 때, 자신 바깥에서의 실존에 대한 공유와 소통이 이뤄진다. 따라서 끝내 가 여행의 끝에서 친척의 귀에 자란 나무를 목격하게 된 것은 공동-존재의 가능성 모색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파도가 높은 날의 그 물속에는 그에게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 그래서 그 어둡고 캄캄한 물속으로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고.”(p71) 잠수부를 끝내 이해하며 사랑을 수긍하는 행위 역시 가 바깥에서 다시 내부 세계의 정상 궤도로 안착하는 삶의 양상을 긍정한다.

이처럼 허무주의를 넘어 죽음을 가로지르는 희망,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희망은 죽음이 더욱 위협적일수록 강렬해진다. 이 희망은 때로 절망보다 더욱 처절하다. 표제작 트로츠키와 야생란가 그러했듯, 오직 낯선 확신”(p101) 하나로 얼어붙은 시베리아의 호수 위를 걷게 한다. 죽음으로 접근해 간 타자와 자아를 경험한 후 스스로의 유폐를 위해 찾은 시베리아. “얼음을 뚫고 피어오르는 식물들, “씨앗이 줄기가 되고 줄기가 가지로 벋어가고 () 가지 끝에 붉은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히고 () 얼음 위에 식물들이 점점 울울해지고 울울해져서 하늘을 덮은 그 숲을, “그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p108) ‘친구의 추락 사고도, 사적 복수를 감행한 것도 모두 하나의 우연에 지나지 않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들에도 실은 우리의 의지와 선택이 들어가 있”(p10)음을 안다.

파편화된 개인 사이를 유영하며 한 마리 검은 고양이가 전개하는 「●●」. 죽음조차 모호하게 만드는 이장욱의 환상성은 미성빌라에서 몸을 던진 은영천사장검은 고양이를 연결 짓고 있다. 이들의 공동-존재지나간 시간이 모여 있는 세계에서, “그 시간들이 다시 돌아올 세계”(p113)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자신을 천사로 믿고, 믿다 보니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 사람은 “30년도 더 전에”(p128) 세계로부터 추방된 존재다. 그의 말처럼 세상은 역상”(p121)이란 도장의 원리로 비춰본다면 모두를 추방하고 남은 세 인물이 꾸려갈 세계 역시 존재할 것이다. 바깥이란 언제나 세계에서 규정짓고 부여한 개념에 불과한 것이므로.

코끼리 고구마 그리고 오조의 발목을 잡은 손들의 인물과 이미지 역시 혼재되어 있다. ‘맨션 방화 사건을 계기로, 어쩌면 그 전부터 상상 속에서 오래 대화를 나누던” ‘연우김수가 비로소 실제로 만나 오래 대화를 나누게”(p260) 될 것이다. 방화 사건의 범인은 법과 테두리란 사회적 지평에서 추방당한 노인 이다. 모든 인물은 상공을 떠가는 구름으로 매개된다. 그것은 연우김수에겐 코끼리의 형태로, ‘에겐 고구마의 형태로 인식된다. 이장욱식의 탈인칭화법은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코뿔소이거나 감자여도 좋을, 그 구름은 서로를 잇는 공동-존재의 촉매다.

. 비인칭의 의식들
삭제. 나는 지우는 자이다.”
─ 「용의자부분 #1 새벽의 모란여관

때로 블랑쇼의 주체는 자신의 주체성과 실존을 영위할 힘을 박탈당한 채 비인칭으로 전락한다. 비인칭의 의식은 어떤 실체나 대상 없이 떠도는 것조차 보게 된다.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대개 이장욱의 소설에서 현존하는 과거, 실재하는 허구다. ‘혹자의 목소리로, 혼령의 형태로 등장하는 하나의 관념인 셈이다.

혹자는 곁에 머무는 인물 인물, 그러나 실체가 없다. 소문이 사람이라면, 사람이 소문이라면 혹자의 형태가 아닐까. “혹자는 무슨 말을 꺼낼 때마다 아, 혹자가 말하길」……이라고 시작하는 버릇이 있었다.”(p179) 이미 존재 자체가 부정형인 혹자. 살아도 죽은 인물, 그러므로 죽어도 살아 숨 쉰다. ‘김지우황보염이 마주한 혹자란, 떠돌다 불쑥 우리 앞에 현현하는 유령과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클레오라면 어떨까? 클레오는 자신의 뼛가루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클레오의 혼령이 틀림없는 사람”(p226).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그런 클레오를 위해 다가가서 인사를”(p228), 클레오는 “1인칭의 기도였지만 동시에 3인칭의 기도”(p229). ‘사람의 사랑을 벗어나서 영원의 사랑 속으로 들어간 클레오의 기도를이해한다. “그런 것은 질문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떠올리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p228)이므로.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데 결국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 사람의 삶.”(p226)

침묵. 다시 돌아온다는 것
침묵.”
─ 「용의자부분 #9 자정의 모란여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본질적 언어가 침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블랑쇼는 주장한다. 오직 그것만이 극단적인 무력과 죽음의 상황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경우의 침묵은 침묵으로써 드러나는, 침묵으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침묵을 통해 일으킨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하는 행위기도 하다. 이때 침묵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치열한 고투 가운데서 발현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어서클레오는 침묵하지만, “저녁 햇살의 일부가 되”(p229)는 방식으로 우리는 언어에 포획되지 않는 박동 소리, 숨결의 묵언(黙言)을 들을 수 있다.

. 당신과의 사랑을
단 하나의 소실점이 확장될 때
내가 단 하나의 소실점에 갇힐 때
─ 「투우부분

블랑쇼에게 작품자체, 또는 글쓰기는 그로부터 벗어나는 표류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책 내부에서 발견되고 분석될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 너머에서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소통을 통해, 다시 말해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작품의 공동구성(co-constitution)을 통해 전개된다.문학의 공간이란 바로 그것이 실현되는 상상의 장소다. 그러므로 작가와 독자 사이의 거리는 공백이라기보다 무중력의 진공 상태다.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가능태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이때의 블랑쇼적 독법은 이장욱에서 미래파로, 문학과 삶 자체로 그 외연을 넓히며 유의미하게 기능할 것이다.

마지막 수록작 노보 아모르는 바깥 경험과 혼재된 환상을 지나 다시 현존하는 세계로 되돌아오는 전개 방식을 취한다. 이장욱의 텍스트를 관류해 온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우울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새로운 사랑을 찾으라고. 게다가 지금은 밖에 비가 내리고 있지 않은가.”(p279) ‘자코메티의 말처럼 이제 마침표를 찍고, 나가야 할 때인듯싶다. 외롭고 치열하게, 세계 바깥에서 새로운 궤도를 그리며, 침묵으로써. “그런 것은 언제나 쓸쓸한 느낌을 주지만, 때로는 그렇게 지나가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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