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를 위해
  • 이정윤 기자
  • 승인 2023.11.20
  • 호수 1575
  • 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동은 태어난 즉시 출생 등록되어야 하며, 출생 시부터 이름을 갖고, 국적을 취득하며, 가능한 한 부모를 알고, 부모에게 양육 받을 권리가 있다.
-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7조 제1항


우리나라에는 유령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이는 바로 가족관계등록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미혼부의 아이들이다. 일반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부여받는 △국적 △이름 △주민등록번호 중 이들은 그 무엇도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다. 통계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이 아이들은 법이 만들어 낸 우리 사회의 유령이다.

유령이 된 아이들
현행법상 미혼부 혼자선 신생아의 출생 신고를 할 수 없다. 「가족관계등록법」 46조에 따르면 혼외자의 출생 신고 의무가 생모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정훈태 변호사는 “생모는 아이를 출산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혈연관계가 증명되지만, 아빠는 그렇지 않아 혈연관계가 확실한 엄마만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생모의 협조가 있어야만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단 것이다.

생모의 비협조로 인해 아이의 출생 신고가 불가능한 경우엔 복잡한 재판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우선, 재판 진행을 위해선 소송을 진행해야 하지만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한 아이는 기본권인 청구권이 없어 본인이 직접 소송을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청구권을 위한 소송은 시작도 하기 전에 미성년자인 아이를 대신하기 위한 특별대리인 선임재판을 두 번 거쳐야 한다. 이후 청구권을 위한 재판부터 성과 본적을 만드는 성본 창설 재판과 가족관계등록부 신설 재판이 이뤄진다. 이렇게 네 번의 재판에서 승소해야만 아이가 대한민국에 존재하고 있단 것을 알리는 인지 청구 와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다.

듣기만 해도 복잡한 이 과정에서 미혼부는 극심한 금전적, 시간적 문제를 겪어야 한다. 정 변호사는 “이 모든 과정에 빠르면 7개월에서 보통 1년 정도가 소요돼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며 “여러 가지 소송이 연관돼 있어 상황에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변호사가 꼭 동반돼야 한다”고 소송 과정의 어려움을 밝혔다.

또한 아이의 생모가 이미 다른 남성과 혼인 관계에 있는 상태에서 혼외자가 태어날 경우에도 출생 신고가 어렵다. 생모의 이혼 후 300일이 지나지 않았거나, 이혼이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가 생길 경우, 출생 신고 시 친부의 아이로 등록하지 못한다. 이 경우 미혼부가 아이를 본인의 가족관계에 올리기 위해선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이 소송은 아이가 법적 남편의 자식이 아닌 친부의 자식임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약 6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 김지환 대표가 출생신고를 위해 1인시위를 진행하는 모습이다.


미혼부 출생신고를 위한 첫 걸음, 사랑이법
이러한 미혼부 자녀의 출생 신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난 2015년 11월 19일 일명 ‘사랑이법’으로 불리는 「가족관계등록법」이 개정됐으나 실질적인 개선엔 한계가 있었다. 사랑이법은 혼인 외 출생에서 생모의 인적 사항을 모를 경우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재판 과정을 거쳐 미혼부인 아이 아빠가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그러나 해당 법이 적용되려면 미혼부가 △등록기준지 △생모의 이름 △주민등록번호를 몰라야 한다는 조건이 존재했다. 정 변호사는 “생모의 이름까지 몰라야 한다는 조건은 말이 안 된다”며 “이 때문에 사랑이법이 개정돼도 현실적으로 적용이 어려워 출생 신고 문제 해결엔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법원은 사랑이법을 다시 개정해 적용 범위를 넓혔다. 생모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인적 정보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정 변호사는 “법원이 사랑이법을 넓게 해석하도록 개정했어도 아빠들이 출생 신고를 하기 위해 소송을 거쳐야 한다는 것엔 변함이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미혼부를 위해 법이 개정됐다 하더라도 여전히 재판을 통해야만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단 것이다.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아이들
복잡한 과정으로 인해 출생 신고를 못 한 아이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인정받지 못해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다. 출생 미등록 아동은 △교육의 기회 △보육 서비스 △의료 시설 사용에서 제외돼 사회보장체계에서 소외되는 상황이다.

우선 출생 신고를 못 한 미혼부의 아이는 보육시설 이용에 제약이 생긴다. 보육 기관에 등록하기 위해선 출생신고증명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리현 대표는 “미혼부들은 출생미등록으로 인해 보육시설을 이용할 수 없어 일을 그만두고 경력이 단절됐다”며 “생계를 포기하고 원룸이나 고시원에서 아이를 양육했던 아빠도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출생 신고를 못 하면 의료보험의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의료시설 사용에서도 불이익이 있다. 김지환 대표는 “아이에게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니 필수 예방접종도 지원받지 못하고 전부 본인 부담이 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비싼 가격에 병원을 이용해야 했다”며 “아이가 아픈데 돈 때문에 병원을 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괴롭다”고 힘들었던 경험을 토로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교육비, 병원비 등 모든 부분에서 미혼부는 지원받지 못해 더 비싼 비용을 내고 이용해야 한다. 김 대표는 “아이는 친부모로부터 사랑받으면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자랄 권리가 있지만, 출생 신고를 하지 못했단 이유만으로 국적과 기본권에 더불어 아빠가 아이를,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다”고 전했다.

가족관계 등록법의 헌법불합치 결정
결국 지난 3월 대법원은 헌법소원을 통해 지금까지 생모만 출생 신고가 가능했던 법안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김 대표를 비롯해 고충을 겪던 미혼부들이 모여 「가족관계등록법」 제46조 제2항에 헌법 소원을 제기하며 미혼부의 아이도 출생 신고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김 대표는 “당시 도움드렸던 아빠들이 많이 모여 소송이 성립되고, 지속적으로 토론회나 간담회를 통해 언론에 꾸준히 나왔던 게 공감 형성에 도움이 된 것 같다”며 “미혼부 자녀 출생 신고에 관한 문제가 앞으로 해결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될 부분들은 남아있다. 정 변호사는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이제 미혼부의 아이들도 출생 신고 될 권리가 있단 것이 인정되고 이에 따라 법안들도 발의되고 있는 긍정적인 상황이지만, 아이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지 미혼부가 친부로 등록되는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며 한계점을 밝혔다.

또한 헌법불합치 판정이 결정됐다 하더라도 사회적 혼란을 줄이기 위해 오는 2025년 5월까지는 기존 법의 효력이 유지된다. 법 개정까지 앞으로 1년 7개월이나 남은 것이다. 김 대표는 “법이 개정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미혼부의 아이가 대한민국의 국적과 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재판을 받아야 한단 사실은 아직 변함이 없는 상태”며 “앞으로 개정될 법안에선 아이의 국적과 기본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어떠한 경우에라도 사각지대가 없게끔 변화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법무부는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해 출생 미등록 아이에 대한 대안으로 출생통보제를 제시했으며, 내년 7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출생통보제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으면 의사에 의해 지자체로 통보되고, 필요하면 시읍면장이 직권으로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단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출생통보제에 대해서도 우려점이 존재한다. 정 변호사는 “출생통보제가 시행되면 다른 법안에서도 고쳐야 할 점이 많다”며 “의사에게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들 수 있는 간접적 권한이 생기는 격이기에 공무 집행 과정에서 민간인을 거쳐도 되는 건지 의구심이 생긴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처럼 미혼부의 출생 신고를 위한 대안책이 나오고 있음에도, 여전히 미혼모의 경우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단 것은 사실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유전자 검사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유전자 검사 제도가 도입되면 미혼부가 출생 신고를 원할 시 가족관계를 바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변호사는 “현재 유전자 검사를 위한 과정이 어렵지만, 유전자가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 검사 제도를 통해 미혼부의 출생 신고 과정을 간소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나타나면서 현행법과 충돌하는 지점이 많아지고 있다. 2년 후 새롭게 개정될 법안에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여 더 이상 아이들과 미혼부들이 피해받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도움: 김지환<미혼부 협회 '아빠의 품'> 대표
정훈태<정훈태 법률사무소> 변호사
박리현<한국가온한부모복지협회> 대표
사진 제공: 김지환<미혼부 협회 '아빠의 품'> 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