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 모든 사랑스런 실패
[칼럼] 내 모든 사랑스런 실패
  • 임지훈 문학평론가
  • 승인 2023.11.20
  • 호수 1575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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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지훈 문학평론가

나는 거대한 악과 싸우고 싶었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마왕에 맞서 세계를 구하고 싶었다. 열심히 검을 휘둘렀고, 검에 멋진 이름도 붙여주었다. 간단한 마법까진 무리였지만, 제 선의는 꼭 알아주시길. 나는 나날이 강해졌고 이대로라면 세계 최강의 용사가 될지도...?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다. 내가 떨어진 이 세계는 애초부터 마왕도 없고 마법도 없고 용사는 더더욱 없는 평범한 세계. 나는 조금의 실수와 약간의 오차로 다른 시공간에 떨어진 것이다. 젠장.

그 뒤로 나는 평범함을 배워나가기로 했다. 사실은 내가 이 세계에 잘못 찾아온 용사라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하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누나가 그러더라. ‘니 눈엔 우리 집이 평범해 보이니?’ 음, 그치? 평범하진 않네. 가난과 불화 속에서 꿈을 바꿨다. 에미넴. 「8Mile」은 못해도, 가좌로7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랩을 했다. 아닌가? 생각해보니 X-Japan 때문에 드럼도 열심히 쳤었네. 하지만 난 현실 세계에선 힘을 잃어버린 용사. 제대로 될 리가 없지.

나는 실패했다. 용사도, 에미넴도 요시키도 되지도 못했다. 전직 용사지만 현실에선 최약체의 삶을 살고 있는 게 바로 이 몸이시다. 그래서 지루하다. 일상의 고통을 견디는 것 말곤 할 일이 없다보니 사는 게 너무 따분하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나는 내 삶을 리셋하고 싶어진다. 다른 시공간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꽤 괜찮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요? 적절한 시공간만 주신다면 나, 꽤나 굉장할지도?

한심하지. 나도 안다 친구들아. 너희들에게는 눈앞의 문제를 직면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모색하라 말하지만, 나는 내 삶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우스갯거리로 만들고 있단다. 하지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때때로 이런 식으로라도 버텨야만 하는 시간이 있다는 걸. 그 시간이 무척 긴 사람도 있다는 걸. 그게 나일 줄은 나도 몰랐지만(웃음).

삶이 비극이 될 수 없단 걸 깨달은 순간부터 차라리 희극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나쁜 걸까?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패배자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이 장엄한 비극은 되지 못해도, 소소한 희극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인생을 비극이 될 수 없는 삶이 아니라, 희극이 돼가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돈키호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모든 실패는 소설 속 한 장면 같은 거라고. “나는 기사야. 오늘도 풍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 이번엔 더 잘 실패할 거야. 더 웃기게 넘어질 거고, 더 웃기게 달려갈 거야. 정신 나간 것처럼 보여도 상관없어. 나는 진짜로 정신이 나갔으니까!”

돈키호테는 실패의 모음집. 하지만 누군가 웃어버리고 말 때면 실패가 성공이 되는 기묘한 이야기. 그건 실패를 잘하는 내가 이 세계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이상한 건, 그러다 가끔은 정말로 풍차를 이겨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단 것. 하지만 이 모든 것엔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진심을 다하기. 누군가의 비웃음에도, 실패를 향해 계속 진지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 나의 진심 앞에 마음껏 웃어주길. 넘어지고 달려가고 또 실패하는 나와 함께 웃고 또 웃어주길. 너희가 웃을 때에 나의 실패는 성공으로 바뀌나니, 마왕도 마법도 없는 세계에서도 용사는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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