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비슷한 전류로 흐르는 사람
[아고라] 비슷한 전류로 흐르는 사람
  • 이승훈 기자
  • 승인 2023.10.09
  • 호수 1572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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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훈<대학보도부> 정기자

지난 여름 친구와 둘이 무작정 제주로 떠났다. 여행에 별다른 이유가 없어서인지 비행기를 타는 일이 처음으로 설레지 않았다. ‘그냥 뭐 타는구나, 뜨는구나’ 정도. 오전 6시의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가는 길에 먹었던 아빠표 김밥만이 내 하루를 채워줄 것 같았다. 무계획이 어색하게 느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때’란 무책임한 생각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장마 기간임을 알고 있었지만, 제주의 자욱한 안개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유일하게 바랐던 제주 냄새 머금은 자연 속 여유를 안개들이 방해할 것만 같았다. 좋아하는 노랠 들으며 해안도로를 달려도, 알맞은 파도를 만나 서핑을 즐겨도 공허한 마음이 잘 사라지질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단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서귀포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이곳을 추천해 준 친구 말처럼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지내는 내내 행복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결과적으로 필자가 상상한 여유로움을 즐기진 못했지만, 사람 냄새로 가득한 여름날의 제주를 만끽할 수 있었다. 

각자의 색깔을 가진 여러 사람을 만났다. 서로 여행을 응원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매일 이별을 겪었다. 돈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하겠다며 편도 티켓만을 끊고 여행 중인 친구도 있었고, 온갖 경험으로 무장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도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이 가진 낭만에 젖어 필자도 김포행 비행기 표를 취소하고 다신 없을 즉흥 여행을 경험했고, 같이 간 친구 몰래 사장님과 다음을 약속하기도 했다. 사나운 울음소리를 내는 제주 바다 앞에서 밤새 나눈 건강한 이야기들은 아직까지 종종 필자를 제주로 옮겨놓곤 한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보낸 제주는 오랜 여운을 남겼다. 건조했던 시작과는 달리 한동안 제주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돌아보면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큰 이유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갈수록 좁아지는 인간관계 속에서 필자가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의 형태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고민 끝에 적어놓은 작은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적당한 자극으로 작용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 너무 강한 자극은 파괴적인 충돌이 되기 십상이라면, 너무 약한 자극은 변화의 동력을 상실시킨다. 어떤 자극이든 나에게 적당한 강도로 완화하거나 증폭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을 테지만, 그게 어려우니 당초부터 내가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전류가 흐르는 사람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얼마 전엔 비슷한 전류가 흐르면 좋을 것 같은 사람을 알게 됐다. 그는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번호를 저장하지 않아도 연락 빈도가 늘면 언젠간 마음속에 더 오래 남는다나. 엉뚱하지만 흥미로웠다. 이야기를 나누면 편안했고, 이 대화들은 필자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제주에서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겨울 냄새가 선명해질 쯤엔 서로가 비슷한 전류로 흐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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