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가작] 거울
[2021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가작] 거울
  • 윤혜수<정책대 정책학과 19> 씨
  • 승인 2021.11.29
  • 호수 1540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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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날도 다른 날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 사실이 아쉽지는 않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지루한 하루였다. 아니 그랬어야만 했다. 그 일은 그가 화장실에 양치를 하러 갔을 때 발생했다.

갑자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왼쪽 새끼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다시 거울 속을 보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면 한 발짝 물러서서 사태를 살필 줄 아는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런 사람. 일단 화장실에 온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했다. 양치를 마치고 다시 거울을 봤다. 여전히 거울 안에 새끼손가락은 없었다. 손에 물을 묻혀 거울을 쓸어보았다. 하지만 때가 끼거나 김이 서린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등 뒤의 타일과 수건걸이,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신체부위는 거울 위에서 선명한 상을 이루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꿈이라기에는 물에 젖은 손과 얼굴의 축축한 감촉이 너무도 생생했다. 거울이 고장날 수도 있는 것인가?

방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인 탁상 거울을 확인했다. 마찬가지였다. 거울에는 모든 사물이 비춰 보였다. 왼쪽 새끼손가락을 제외하고.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는 했지, 이럴 때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는 것이 제일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오늘은 일찍 잠들기로 했다. 깨어나 보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어있을 터였다. 그는 감기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피로를 덜어낸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봐도 상황은 똑같았다. 그의 왼쪽 새끼손가락은 분명히 그의 손에 붙어있었다. 하지만 거울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생각을 해보았다. 필시 눈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좋지 않았다. 공무원 시험이 두 달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거지같은 노량진 원룸에 틀어박힌지도 3년째였다. 올해는 반드시 합격해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책을 읽고 인터넷 강의를 보는 데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시험 준비에 비하면 이런 사건은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하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새끼손가락 한 쪽쯤 거울에 안 보인다고 요란을 떨 일이 아니었다. 병원은 시험이 끝나고 가도 늦지 않았다.

 

요 며칠 그의 예상은, 아니 염원은 모조리 빗나가는 듯 했다. 이제는 왼쪽 팔이 통째로 보이지 않았다. 직접 팔을 볼 때는 다른 것이 없었다. 거울에 비치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점점 그 부위가 넓어지는 것이 신경쓰였다. 외면한다고 없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책을 너무 오래 봐서 안구건조증이 온 것이 아닐까? 안약 몇 방울, 처방약 몇 포에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날 새벽까지 네이버에 안구건조증에 관련된 키워드를 검색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그는 문밖을 나서기로 했다. 누군가를 만나러 외출하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수강생들에 치이는 게 싫어 학원 현장 강의에 나가지 않은지도 꽤 되었고, 볼펜 딸깍거리고 한숨 쉬는 소리가 거슬려 독서실에 나가지 않은지도 오래였다. 코로나에 걸려 시험에 지장이 갈까 두려웠던 것도 외출을 삼간 이유 중에 하나였다. 최근에는 그저 어둠을 틈타 생필품을 사러 왔다갔다한 정도였다. 오랜만에 햇빛을 받으니 눈이 부시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확실히 눈이 약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고시원에서 가장 가까운 안과 의원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병원에 가는 것은 언제나 싫고 두려운 일이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 안과의원이라 붙어있는 유리문을 보자 갑자기 오금이 저리는 게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볼일을 보고 나와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역시나 거울 속에는 왼팔이 없었다. 뒤이어 화장실 칸에서 나온 사람이 손을 씻기 위해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는 거울 속의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모자란 부분이 없었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 사람도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상대방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별 이상한 놈 보겠다는 시선으로 미루어보건대 그 사람에게는 그의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이는 듯 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인가. ‘정상의 개념은 누가 정하는가, 반항적인 생각을 품으며 화장실을 나와 의원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과 의사는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원한다면 큰 병원 안과에 가서 더 정밀한 검사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의 증상과 같은 증상이 눈의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뇌종양처럼 뇌에 이상이 있는 경우에 시각에 이상이 생길 수 있으니 대학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라며 진료의뢰서를 써 주었다.

 

가장 가까운 대학 병원에서 검사와 진료를 받을 때까지 그는 며칠간 낮밤을 가리지 않고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뇌종양으로 판명난다면 이렇게 인생이 끝나버리는 것인가? 뇌종양이 아니더라도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면, 앞으로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시험은? 시험은 볼 수 있는 것인가? 생각이 복잡했다. 마침내 신경외과 의사에게 결과를 들었을 때, 그의 생각은 더욱 복잡해졌다. 의사는 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며, 그의 증상과 같은 증상이 뇌의 질병으로 인해 생긴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신과를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돌팔이 같으니, 병원문을 나서며 그는 생각했다.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저런 인간이 교수라니 이 병원 수준을 알 만했다. 자기 실력의 부족을 인정하기 싫어 사람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다니. 저런 한심스런 인간은 되지 말아야지.

 

그는 그냥 증상과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무시하기로 했다는 편이 더 적절하겠다. 시험이 다가올수록 신체적 증상을 호소하는 수험생들이 많아지는 현상은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증상들은 대부분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일차적으로 완화되고, 시험 합격 소식을 듣는 즉시 눈 녹듯 사라져버린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돈만 밝히는 돌팔이 의사놈의 말에 휘둘리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합격만 한다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다.

 

수염이 손에 꺼칠하게 만져졌다. 마지막으로 면도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목 밑으로 아무것도 비치지 않게 된 날, 집안의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부숴버렸다. 그저 감촉을 통해 수염 길이를 추측할 뿐이었다. 거울을 못 보는 것은 성가시기는 했지만 사소한 불편사항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그는 그곳에 존재했으며,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말 태평하게 지냈던 것은 아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한 그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시시때때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자신의 증상을 나열하며 조언을 구했다. 그러고는 아무 답변도 달리지 않은 게시물들, 혹은 정신병 있냐는 비웃음이 달린 게시물들을 황급히 지우는 것이 그 다음 순서였다.

정신에 문제가 있냐는 말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정신병은 나약한 인간들이나 걸리는 것이라는 것이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그의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언제나 그를 병신으로 여겼다. 그도 어렸을 때는 꽤나 촉망받던 학생이자 가족의 자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그를 무른 놈으로 볼 뿐이었다. 하지만 공부깨나 한다는 고등학교 안에서의 경쟁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던 듯 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결국 수업일수를 채우지 못해 유급 당하기 직전 휴학을 했다. 그때부터였다. 아버지가 그를 대놓고 병신 취급한 것은. 아버지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위인이었다. 그는 문제였고, 아버지에게 그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시기에 이런 생각은 적절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합격만 한다면 아버지도 더 이상 그를 그렇게 취급하지 못할 터였다.

 

그 일은 시험이 한 달 남은 시점에 일어났다. 왼쪽 새끼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가 모자란 손의 이미지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는 손을 앞뒤로 뒤집어보았다.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있어본 적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것은 문제였다. 그가 그동안 상대적으로 태평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잊고 살면 그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울을 보지 않는다는 처방은 효과가 없어졌다. 당황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애써 침착하게 볼펜을 집어 새끼손가락이 있어야 할 위치에 대고 밀어보았다. 볼펜의 질감이 느껴졌다. 볼펜 또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볼펜을 가로로 눕혀 새끼손가락 위에서 균형을 잡아보았다. 보이지 않는 것 위에 볼펜의 중심을 맞추는 것은 쉽지는 않았지만 시행착오 끝에 해낼 수 있었다. 기묘한 장면이었다. 뿌리만 남은 새끼손가락과 그 앞에 공중부양하듯 흔들리고 있는 볼펜은.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는 이를 닦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형광등이 눈부셨다. 애들 장난처럼 손으로 형광등을 가려보았다. 텅 비어있는 손가락 자리는 형광등 빛 역시 막아주지 못했다. 그곳에 손가락이 계속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손가락이 가하고 손가락에 가해지는 물리력,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그의 감각뿐이었다. 그는 하릴없이 손을 쳐다봤다. 이런 모습도 계속 보다 보니 적응이 되는 것이 우스웠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신체 일부가 사라지기라도 했다면 몹시 곤란했을 것이 아닌가. 그것도 손가락이 없어지다니, 정말 없어졌다면 펜도 못 잡고 시험에 응시하는 데에도 실질적인 문제가 생겼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평생에 긍정이라고는 모르고 살던 자신이 사태의 긍정적인 부분을 찾으려 애쓰는 것도 웃겼다.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설친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 명문대만 갔으면 공무원 시험 같은 건 구태여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병신 같은 대학에 간 게 문제였을까? 남들처럼 고등학교만 평온하게 다녔어도 명문대에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휴학 끝에 고등학교를 자퇴했는가? 그것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그는 겨우 그 정도 스트레스에 굴복해 자퇴를 한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헛웃음은 점차 진짜 웃음이 되어갔다. 그는 그날 정말로 오랜만에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때렸다. 그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축축하고 꿉꿉한 날씨는 최악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비 오는 날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침침한 날씨보다는 쨍한 날씨가 더 기분이 나빴다. 무엇보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요 며칠 사이에 발견한 새로운 장점도 있었다. 차가운 빗방울의 감촉은 그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사실 그는 언젠가부터, 이런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아마도 고등학교 자퇴 후부터- 자신의 인지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가? 일상에서 보고 듣는 그런 경험은 영화나 유튜브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나 유튜브가 현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보통 도움을 주는 것은 후각과 촉각, 미각이었다. 추측건대 현재의 기술로는 현실로 느끼는 것 외에는 이런 감각을 재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언제나 뭘 먹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미각은 논외로 쳐야 한다. 후각은 마스크를 쓰고 다님으로써 차단당했다. 코로나가 그에게 가져다 준 개인적인 불편이었다. 남은 것은 촉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람을 좋아했고, 여름의 뙤약볕과 겨울의 추위를 선호했다. 지금까지 이런 일련의 생각은 어떻게 보면 철학적이고,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두뇌운동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각으로 스스로의 몸을 확인할 수 없게 된 지금으로써는 실질적인 문제였다. 이 상태에서 촉각마저 사라진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그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정신과에 가볼 용기를 낸 것도 날씨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눌러썼다. 엉망일 얼굴을 가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보이지 않는 팔을 움직여 신발장을 열고 우산을 꺼내는 건 쉽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시야 밖으로 팔다리가 나가면 팔다리가 어디 있는지 몰라 걷지 못한다는 질병이 있다는 인터넷 기사가 떠올랐다. 그가 이제는 보이지 않는 팔다리를 움직여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이십몇년간의 경험 때문이리라. 팔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여주는 옷소매도 한 몫을 했고. 문고리를 돌리기 전, 그는 잠시 주저했다.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이미 후회가 몰려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병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병신이 아니라고 눈을 감아버리는 병신도 아니었다. 그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문을 밀어젖혔다. 거리로 나서자 빗방울이 그를 반겼다. 빗방울이 차가웠다.

 

그가 도착한 곳은 지난번의 그 대학병원이었다. 사람이 가장 없을 것 같은 아침 시간을 골라왔건만, 눈 앞에 펼쳐진 인파는 정신이 어찔할 정도였다. 동네 병원으로 갈 걸 그랬나 잠시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는 한 큐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심산이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냐는 접수 직원에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왔다고 얼버무렸다. 제 몸이 보이지 않아서요, 라고 답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훌륭하게 첫 시험을 통과했지만, 정신과 앞 대기석에 앉아있는 것은 또다른 시험이었다. 당일예약인 그는 기존 예약자가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정신과 대기석은 꽤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간혹 지나가는 행인이 무심코 쳐다보고 지나갈 때마다 그는 자리를 뜨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갑자기 너무 담배가 피고 싶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더듬었지만 빈 담배갑만이 잡혔다. 왜 이렇게 풀리는 일이 없는 걸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도 대기열은 한참을 늘어서 있었다. 병원 지하에 있는 편의점에 방문할 시간이었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병원의 공기는 끈적하게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진열된 상품들을 보니 배가 고파왔다. 식품코너를 돌며 포장빵 몇 개를 집어들던 중, 편의점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는 일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사건이었다. 그가 편의점에 조금이라도 일찍 왔거나 조금이라도 늦게 왔더라면 그의 인생은 바뀌게 되었을까? 인생은 원래 지극히 사소한 계기로 틀어지곤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건 그냥 사소하고 우연한 사고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와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재수없는 뱁새 놈이 문을 밀고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뭐가 재미있는지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의사 동료들에 둘러싸여, 의사 가운을 입은 채로. 그는 속이 홱 뒤틀리는 것 같았다. 뱁새가 의대에 진학했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성적이 좋긴 했지만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았는데, 운이 억세게 좋았던 모양이라 결론내리고 마음속 한구석으로 몰아넣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얼른 머릿속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모자 밖으로 삐져나온 덥수룩한 머리, 마스크 밖으로도 보이는 지저분한 수염, 너절한 추리닝까지. 손에 든 빵봉지마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마주치기에는 최악인 상태였다. 뱁새놈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리는 것 같았다. 그놈이 당장에 자신을 알아보고 말을 걸 것만 같았다. 여기에는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고 물을 것만 같았다. 그는 손에 들었던 물건을 팽개치듯 선반에 내려놓고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 담배 같은 것은 잊은지 오래였다.

 

병신 같은 짓이었다. 전부 다 병신 같은 짓이었다. 병원에 가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별 것도 아닌 게 별 것도 아닌 의사 좀 됐다고 으스대는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정신과에 가봐야겠다는 나약한 생각이 이런 개같은 결말을 불러온 것이다. 뱁새놈이 있는 자리는 응당 그가 있어야 했던 자리이다. 고등학교 때 그놈은 공부를 그보다 그렇게 잘하지도 않았다. 그가 그 멍청한 자식에 비해 모자란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의 인생은 무언가 잘못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바로 잡아야 했다. 바로 잡으려면 먼저 시험에 붙어야 했다.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그는 병원문을 박차고 나섰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는 완벽한 해답을 알고 있었다. 합격만 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터였다. 합격만 한다면 모든 것이 보상받을 것이었다. 우산 같은 건 쓰지 않았다. 장대비가 내렸지만, 그는 이제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인간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시간은 묵묵히 흘러갔다. 시험 당일이 되었고, 수많은 수험생이 고사장에 몰려들어 시험을 치고 고사장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의 수험번호가 붙은 책상은 비어있었다. 아침부터 비어있었고, 저녁 때까지 비어있었다.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결시 사유를 뭐라고 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존재없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사라졌다. 그가 실제로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닌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그는 더이상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는 끝까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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