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이지 않는 ‘고려인’의 아리랑이 정녕 들리지 않는가?
끊이지 않는 ‘고려인’의 아리랑이 정녕 들리지 않는가?
  • 이예종 기자
  • 승인 2019.09.08
  • 호수 1499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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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9월 초가 되면 ERICA캠과 가까운 안산시 선부광장에 고려인의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1937년 9월 초부터 시작된 고려인 강제이주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그들은 연해주에 살던 한민족으로,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뜯기고 버려진 그들, 끝내 살아남다
1937년 9월, 스탈린은 고려인 약 20만 명을 지금의 중앙아시아독립국가연합(이하 CIS 지역) 부근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오랜 시간 고려인의 삶을 연구하고 함께 생활해온 이원용<글로벌다문화연구원> 박사는 “30년대, 사회주의체제가 안정되지 않았던 소련은 동쪽에서는 일제, 서쪽에서는 나치와 갈등도 겪고 있었다”며 “일제에게 고려인은 ‘만주를 공격할 위험인자’로, 소련에게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할 명분’으로 여겨졌다”고 설명했다. 이주 과정에서 고려인의 반항을 억제하기 위해 소련은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을 전부 죽인 뒤 남은 이들을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에 버렸다.

고려인은 살아남기 위해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고려인은 CIS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김우현<사단법인 ‘너머’> 활동가는 “소련 시절 고려인 김병화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북극성 농장을 대폭 성장시켜 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며 “고려인은 농업 외에 예술과 상업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이에 이 박사는 “소련에선 타민족도 언어와 능력이 뛰어나다면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고, 고려인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또다시 내쳐지는 그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자민족중심주의’가 발흥해 고려인은 다시 위기에 처했다. 이 박사는 “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베크)은 점차 관직에 자민족만 채용하기 시작했고, 기존에 있던 타민족 관료는 내쫓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 박사는 “우즈베크의 인사 정책과 심각한 부정부패는 자민족 관료들이 타민족을 쉽게 착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며 “이 때문에 소수 민족 사업가들은 다양한 이유로 수입을 떼여 실질 소득은 막노동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경제적으로 기회를 박탈당한 고려인은 주로 한국과 러시아로 이주하려고 한다. 다만 한국은 영주권을 취득하기 너무 어렵고 언어도 새로 익혀야 하는 반면, 러시아에선 훨씬 수월하게 영주권을 얻을 수 있고, 사용언어도 같아 많은 고려인이 러시아로 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박사는 “그래도 한국에서 적응하고 싶어 하는 고려인이 상당히 많다”며 “고려인을 종종 민속촌이나 독립운동가 박물관에 데려가면 ‘여기가 내 조상이 살던 곳이구나’라며 어찌나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른다”고 전했다. 이렇듯 많은 고려인은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민족적 이유로도 한국을 찾고 있다.

고려인의 노크에 귀 닫은 정부
지난 5월에 법무부가 발표한 ‘전국 고려인 체류비자별 분류조사’에 따르면, 국내 거주 고려인 7만4천 명 중 영주권을 획득한 고려인은 356명으로 0.48%에 불과하다. 그나마 동포 인정을 받아 재외동포비자(F-4)를 받는 사람은 4만2천 명가량이다. 나머지 3만2천 명은 F-4비자도 받지 못해 매우 불안정한 단기 체류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5월 발표된 사단법인 ‘너머’의 ‘고려인 생활실태조사’에 따르면, 67%의 고려인은 한국에서 계속 살기를 원한다.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해선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와 시험 합격, 소득 조건 등을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려인은 △경제적 문제 △시간적 문제 △언어 문제 등 많은 장벽에 부딪혀 영주권 취득을 포기하고 있다.  특히 언어 문제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일자리 선택 기회를 줄이고 열악한 일자리는 언어학습 시간을 줄인다. 김 활동가는 “현지 학력과 경력을 보유한 고려인도 언어 문제 때문에 대부분 공장이나 일용직 등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려인들이 한국에서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그래프다.
고려인들이 한국에서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그래프다.

실제로 고려인의 삶의 질은 최악 수준이다. 같은 조사에 따르면 가계 총수입이 200만 원 이하인 고려인 가구는 무려 75%에 달했다. 금전적 문제로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고려인 가정은 55%에 달하고,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거주하는 고려인 가족은 59%다. 이외에도 3D 업종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는 등 고려인 다수가 심히 열악한 처우에 고통받고 있다. 사단법인 ‘너머’는 이들의 어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한국어 교실과 생활·노동·법률상담을 위한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고려인 미래세대인 아동·청소년을 위해 △고려인청소년봉사단 운영 △멘토링 수업 △모국 문화체험 △방과 후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는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많은 나라를 원조하고 있으나 정작 고려인 동포는 돕지 않는다”며 한탄했다. 또한 이 박사는 “선택이 아닌 강제로 고생하고 돌아온 이들을 위해 영주권 취득이라도 조금 간소화 해달라 요청하고 있지만, 정부는 ‘고려인에게만 영주권 취득 절차를 간소화해주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일관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고려인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음에도 ‘형평성’ 문제만 지적하며 고려인의 참담한 생활 수준과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정부는 고려인을 마치 ‘타국의 난민’처럼 대하고 있는 듯하다. 맞다. 고려인은 타국에서 떠돌다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난민이다.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것은 고려인이 끌려간 뒤 이제서야 돌아온 것뿐인 ‘우리의 난민이자 실향민’이라는 사실이다.

도움: 이원용<글로벌다문화연구원> 박사
김우현<사단법인 ‘너머’>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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