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기승전먹방’에 대한 단상
[장산곶매] ‘기승전먹방’에 대한 단상
  • 김종훈 편집국장
  • 승인 2019.05.12
  • 호수 1495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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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편집국장
▲ 김종훈<편집국장>

‘회사에서 연애하고, 학교에서 연애하고, 병원에서 연애하고’

드라마를 잘 안 보는 사람이라도 우리나라 드라마의 ‘기승전연애’식 전개 방식를 비꼬는 이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장르의 드라마든 등장인물 사이의 러브라인은 드라마에 빠져서는 안 되는 공식이었다. 물론 사랑이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지만 맥락 없는 러브라인은 드라마의 재미를 갉아먹는 요인으로 지적됐다.

이런 드라마계의 흐름도 지난 2014년 「미생」이 러브라인 없이도 흥행에 성공한 이후 조금씩 바뀌는 듯하다. 「미생」보다 비교적 최근 방영된 2017년 「비밀의 숲」, 2018년 「라이프」같은 장르물도 러브라인 없는 드라마로 시청자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종교나 엑소시즘 같은 우리나라에서 다소 생소한 주제를 다룬 드라마들도 등장하며 ‘기승전연애’에서 벗어난 것을 넘어 장르가 다양해지는 것 같다.

이런 드라마계의 변화와 달리 예능계는 반대로 한 가지 주제로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필자뿐일까.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이 ‘먹방’(먹는 방송) 혹은 ‘쿡방’(요리하는 방송)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먹방이나 쿡방의 변주가 이뤄진다. △어린이 △외국인 △유명 배우 등 사람의 변주가 있는가 하면, 국내 맛집이나 해외 맛집에 찾아가는 장소의 변주도 있다. 여기서도 부족했는지 정글까지 간지 오래다.

사실 먹방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곳은 TV프로그램이 아니다. 아프리카TV나 유튜브 같은 1인 미디어 플랫폼이 먹방의 성장과 유행을 이끌었다. 먹방을 주 콘텐츠로 하는 1인 미디어는 10년 전부터 이미 많았다. 그곳이 진정한 먹방의 천국이다. 유튜브에 ‘음식 이름 + 먹방’이라고 검색하면 수많은 유튜버들이 해당 음식을 다양한 방법으로 먹는 동영상이 줄을 잇는다.

대중에게 알려진 먹방 유튜버인 3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벤쯔는 1인 먹방 크리에이터로 시작했다. 그는 현재 기존 플랫폼을 넘어 TV까지 진출해 유명세를 탔다. TV프로그램 제작들도 대중이 먹방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먹방에 뛰어든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부터 먹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KBS의 장수 프로그램인 「6시 내고향」은 대표적인 먹방 프로그램이 아닌가. 전국 각지의 제철 음식을 먹는 리포터의 모습은 필자에게 익숙하다.

먹는 행위는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사랑을 안 하는 사람은 있어도 먹지 않는 사람 없다. 필자도 매끼마다 어떤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고, 먹는 것에서 얻는 즐거움도 크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최근 예능 프로그램 먹방·쿡방 일변도는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채우는 모습으로만 TV프로그램이 구성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말에 TV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주말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점심을 먹고 TV 앞에서 먹방을 보고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저녁을 먹는다. 그런 뒤 다시 TV를 틀면 먹방이 나온다. 하루 종일 먹고, 먹는 영상을 보는 식욕에 둘러싸인 삶을 사는 것이 과연 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물론 먹방이 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을 모두 미디어 제작자에게 돌릴 수 없다. 먹방·쿡방은 안전한 장사다. 어느 정도의 포맷이 갖춰져 있고 찾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적당한 노력만 들이면 실패는 하지 않는다. 먹방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줄어들면 제작자도 그 수요을 좇아 프로그램을 제작할 것이 자명하다.

그래도 욕심있는 컨텐츠 제작자라면 대중들의 취향을 맞춰주는 것도 좋지만, 먹방을 뛰어넘는 트렌드를 만들 욕심이 있을 것이다. 매번 트렌드를 뒤쫓아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자보다 용기 있게 앞장서서 새로운 장르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자가 나올 수는 없을까. 2019년 하반기에는 더 다양한 TV프로그램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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