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4 시대’가 지고, ‘춘추전국 시대’가 열리다
‘빅4 시대’가 지고, ‘춘추전국 시대’가 열리다
  • 정서윤 기자
  • 승인 2018.11.26
  • 호수 1486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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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기 전 또는 마지막에 스크린을 꽉 채우는 투자배급사들의 이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4개 대형 배급사(이하 빅4)인 △CJ E&M △Lotte Cultureworks(롯데컬처웍스) △NEW △Showbox(쇼박스), 이들은 우리가 흔히 봐왔던 국내 투자배급사들이다. 소위 ‘빅4’라고 불리는 이들은 절반 이상의 국내 영화를 투자·배급하며 입지를 다져왔다.

하지만 한국영화 투자배급 시장에 자본력을 갖춘 국내 신생영화투자배급사가 등장하면서 ‘빅4 시대’에 균열 조짐이 보이고 있다. 현 한국 영화 투자·배급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빅4에 중국 최대 엔터테인먼트 그룹 ‘화이브라더스’의 자본으로 설립된 투자배급사 ‘메리크리스마스’가 가세했고, 화장품 업체 ‘AHC’의 창업주인 前 카버코리아 회장이 투자한 투자배급사 ‘에이스메이커’도 문을 열면서 영화 시나리오를 가져갈 회사가 늘어났다. 쟁쟁한 인재들을 영입한 신규 업체들이 합류하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한국 영화 시장에 자본력과 기획력을 앞세운 신규투자배급사들이 등장하며 국내 영화 시장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유독 지금 주목받는 그들
최근 한국영화 산업은 5년 동안 연간 관객 수를 비슷하게 유지하며 정체 국면에 들어섰다. 빅4 투자배급사들마저 수익을 내는 영화들의 감소로 활기를 잃으며 전체적인 한국영화 산업이 정체된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빅4 투자배급사의 전체 영화시장 점유율은 2013년부터 하락세를 보이다가 지난해 처음으로 50%에 못 미쳤다.

문화평론가 김성수 씨는 “한국영화 산업 정체의 가장 큰 원인은 제작부터 유통, 배급 등의 여러 분야에서 특정 기업들이 스크린을 독과점한 것”이라며 “이는 영화의 다양성 훼손으로까지 나아갔다”고 말했다. 길종철<예체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도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익숙한 영화배우의 등장, 검증된 감독 등만을 특징으로 하는 영화들만 계속해서 집중 투자·배급되면서 영화의 다양성이 감소했다”고 전했다.

정체 국면에 접어든 한국 영화 산업에 신규투자배급사들의 등장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김 씨는 “이전의 투자배급사 진입 사례는 특별히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갖춘 작은 작품들만을 투자 목표로 개성 있는 배급사들 위주였다”며 “현재는 일정한 자급력과 풍부한 자본, 경쟁력까지 갖춘 투자배급사들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신규투자배급사들의 시장 진입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즉 대한민국 영화 산업에 양질의 신규투자배급사들이 들어오면 제작사들은 자신의 영화에 투자·배급할 선택지가 많아지게 돼, 영화 산업의 확대 및 다각화로 이어진다. 길 교수는 “신규투자배급사의 증가는 영화투자배급시장에 투입되는 자본의 양을 늘리고 영화를 바라보는 전문적인 시각도 다양화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러한 신규 투자배급사가 등장하면 관객들이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소비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길 교수는 “이전에 투자를 받지 못했던 영화들도 신규 투자배급사의 투자를 받아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며 “이는 관객들의 영화 선택의 폭을 넓힌다”고 말했다. 이상훈<예체대 연극영화학과 17> 씨도 “빅4 투자배급사들이 한국 영화계를 꽉 쥐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영화들만 나오는 게 한국 상업영화계의 현실이라 생각한다”며 “새로운 투자배급사들이 생겨나면 그만큼 도전적이고 다양한 영화들이 생겨날 것”이라 기대했다.

그저 달콤하지만은 않은 등장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존재한다. 한국영화산업 매출은 수년간 정체된 만큼 최근 신규투자배급사의 등장은 업체 간 경쟁을 한층 치열하게 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길 교수는 “새로운 투자배급사의 등장으로 기존의 빅4 투자배급사들이 자유롭게 제작사를 선택할 수 있었던 환경에 변화가 생겼다”며 “투자배급사 시장 내 영화 확보를 위한 경쟁이 과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쟁 구도가 심화하면 투자배급사들은 시장 내 자본 확보에만 초점을 맞춰 장기적으로는 영화 콘텐츠의 질을 하락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길 교수는 “신규투자배급사들이 영화 시장에 진입할 때는 기업의 단기적인 수입 확보 및 단기 자본 실적 향상에 모든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며 “무엇보다 국내 영화 산업의 일원으로서 산업 발전에 얼만큼 꾸준히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지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둬야한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CJ E&M이 베트남 현지 제작사와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등 기존 배급사들이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서면서 한국영화만의 정체성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돈이 되는 해외 투자자들의 요구에 집중해 국내 관객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콘텐츠가 투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외국 자본에 의존하다 보면 한국의 정서를 담고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며 “이는 결국 한국영화시장에 최적화된 것이 아닌 해외영화 시장 확대에 공헌하는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신규투자배급사의 등장’이라는 영화계 내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며 제작사, 투자사, 관객들 모두 한국 영화 산업의 확장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신규투자배급사의 등장이 영화 산업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길 교수는 “변화는 이제 막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은 결과를 판단하기 이르다”며 “오랜 시간동안 신규투자배급사들의 모든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지각변동은 결국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제작사, 투자배급사, 관객들 모두 최근 영화 투자배급 시장 내의 지각 변동에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도움: 길종철<예체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김성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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